한국에 삽니다 _ 안드레스 솔라노
내가 태어난 나라에 관한 이방인의 시선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던 책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대로 내가 한국인으로 외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들이 오묘하게 교차했다. Wisdom teeth를 불어로도 Dent de sagesse로 같은 뜻으로 부르는데 스페인어로도 같은 단어였고 그는 한국어로는 왜 사랑니라고 부르는지 궁금해 했다. 나 역시도 치과에 갈 때 마다 언제나 이 질문이 흐릿하게 맴돌았었다. 잃어버린 단어에 대한 일화도 기억에 남는데 솔라노작가는 ‘바질’이라는 단어를 잊었었다. 나는 몇 주전에 우연히 고교동창 후배를 만나게 되어서 중학교는 어디를 나왔냐는 질문에 온몸이 굳었던 적이 있다. 이름이 기억 안나니 강릉시에 있는 중학교 이름 좀 먼저 대보라는 말을 하면서도 이 여자아이가 나를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동명중이라는 단어가 나왔을때 아주 반가운 이 세 음절을 아주 소중하게 몇 주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3년동안 다녔던 중학교 이름을 잃어버릴 수가 있을까 하는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솔라노작가가 부산역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결인데, 방향감각과 공간감각이 좋은편인 나는 이제 익숙해진 파리의 골목길들은 지도없이 요리조리 잘 걸어다닐 수 있다.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아뜰리에에서 15구에 있는 우리집까지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 도착하는 것이나, 점심시간에 자주가는 카페에서 테라스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만 해도 직원이 척척 알아서 내가 항상 마시는 커피를 가져다 주는 것 등. 내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이렇게 떨어진 나라에서 나의 동선과 터전이 조금씩 자리잡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파리로 이사오기 전, 베트남 생활이 3년차 쯤 되었을 때는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선물 주머니처럼 꺼내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내가 사는 나라가 된 것 같았다.
내 친구들은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시아 여자와 결혼해서, 글로 벌어 먹고살겠다는 미친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보고타에 살았다면 그저 사무실에 붙잡혀 있었을 텐데, 그대신에 작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나라는 몽상가를 보며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지도. 상사도 부하 직원도 없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도 가까이 없다. 내 모든 인간관계는 수평적이다. 나는 사람들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고, 이러다 그냥 유령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해로운 생각만 빈번해진다. 나나 친구들 모두 메일 같은 건 서로 보내지 않고, 보낸다 하더라도 아주 가끔이다. 모두가 각자의 삶에 몰두해 있다. 어떤 친구는 얼마 전 거머쥔 권력 한 덩어리에, 또 다른 친구는 가족 아니면 마약에, 그것도 아니면 나는 모르는 다른 무언가에 전념한다. 15살 때 만나 30대까지 수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 너무 가까워서 피곤한 관계. 오랫동안 해왔던 그대로 다시 한번 한 곳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지칠 줄 모르고 똑같은 얘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 이제는 우리 모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같은 이야기 반복하기와 닳아빠진 농담 끝없이 지껄이기가 위협으로 떠다닌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는 저런 시절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두렵고 복잡하다. 새로운 친구는, 그런 친구가 있기라도 한다면, 언제나 나의 예전 친구들과 비교될 것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내 삶을 침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친구들이 그립고 모두 여기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 어느 야시장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한편으로는 좀 두렵기도 하다. p.104
“작가만이 이룰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목표는 불안한 마음들을 채우는 것이다.” _루벰 폰세카 Rubem Fonseca
밖에 있는 커피숍에서는 많은 회사원이 곱게 갈아서 눈처럼 소복하게 쌓은 얼음 셔벗에다 단팥을 얹은 디저트를 먹고 있다. 나로서는 아직 맛볼 용기가 안 나는 음식이다. 나에게 팥이란 짜게 조리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한 번 깨트리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p.151
내가 열망하는 것 하나 더:
한국 노인이 되는 것.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전쟁 영웅이나 독립 투사 출신이 되어, 핸드폰 가게나 화장품 가게에서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은 짜증 나는 음악이 나오는 스피커들을 야구 배트로 전부 부숴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말 이래선 안 된다. 저 소음들은 마치 길바닥에다 쓰레기통을 엎어 통째로 부어버리는 것 같다. p.159
잘 쓰지 않는 몇몇 단어들은 이제 내 머릿속에서 조금씩 사라져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하루는 풀 이름 하나를 생각해내는 데 몇 분이 걸렸다. 바질. 가장 좋아하는 성인의 우표를 붙들고 있는 신도처럼 그 단어를 온종일 붙잡고 있었다. p.171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택시를 탔다. 택시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안경을 쓴 중년의 기사가 우리에게 공책 한 권을 건넸다. 수정은 순간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빨리 기사가 설명하길, 자신의 승객들이 글을 남긴 공책이라고 했다. 내가 무언가를 쓸 동안 수정은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공책을 하나 읽었다. 가장 처음 글은 2010년에 쓴 것이었다. 여의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그 시간 내내 공책을 읽던 수정이 눈시울을 붉혔다. 몇 개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바람에 관한 짧은 시도 한 편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가 직접 쓴 것이었다. 명료하면서도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는 않은 시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글 대부분이 마음 속으로 부터의 고백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이들 모두가 맺힌 감정들을 터놓기 위해 이 택시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혼자다. 아내는 거의 집에 없다. 아들은 나를 미워한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번째 만나러 가는 길이다. 너무도 설렌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 가장 멋진 여자다.”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삶일 것이다. 삶의 순수한 상태. 나도 따라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p.173
한국의 텔레비전채널은 교육 관련 프로그램과 드라마, 그리고 속임수와 예상치 못한 매질과 슬랩스틱이 난무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드라마틱한 한국의 영화에도 항상 누군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건 등짝이나 어깨, 머리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갈기는 것이다. 이는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p.178
도착할 때가 되자 비디오게임 음악이 잠을 깨웠다.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해야 할 행동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생각했다. 지하철의 몇 호선을 타야 하는지, 어디에 가면 중국식 돼지고기만두를 먹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텍사스 스트리트에 들어가면 러시아 선원들을 위한 키릴문자 안내판이 있다는 것도, 그곳에 즐비한 술집들이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부드럽고 어스름한 미소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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