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손택의 말_수전 손택.조너선 콧
한 사람의 가치관 그 자체가 향하는, 시선과 마음들과 사유가 내가 그렸던 것과 이렇게나 같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말들은 온전하게 합쳐저서 다다르고자 하는 곳에 포근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손택의 문장을 담으며 생각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모호하게 가졌던, 그녀와 비슷한 방향이지만 또 다른 자아가 갖고있는 생각을 정확하고 솔직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을.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이다./ 라는 말이
오롯이 모아지도록 만드는, 손택의 은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신기한 기억의 메커니즘이 있다.
수첩에 적어놓은 문장들을 어디서 읽었는지 누구에서 읽었는지 읽혀졌는지. 하나하나 기억 한다는 것.
어쩌면 그 전해짐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내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신기한 기억력이다.
사람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제 인사를 건넸던 애가 tim인지 jason인지 jay인지 alex인지 denny인지. 이건 나에게 분위기가 다 비슷한 이름들.
이런 이름의 집합 중에 하나라는 것만 기억하는 것도 충분한 일.
남들이 기억하는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남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완전한 형태로 어쩌면 완전히 변형된 형태로 섬세하게 기억한다.
"정신의 생명에 대해 생각해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은유는 바로 살아있다는 감각이다"라고 정치과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삶의 숨결이 없다면 인간의 몸은 시체다. 생각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죽는다." (...) 그녀는 선언했다. "지성적이라는 건, 내게는 어떤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나 자신이 수동성(그리고 의존성)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정신을 활용하면, 그 무엇이 나를 능동적으로(주체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준다. 좋은 일이다. p.7
글 쓰기는 포옹이며, 포옹을 받는 것이다. 모든 사유는 손을 뻗어 내미는 사유다.
그런데 사유하지 않으면 흔히 통용되는 클리셰를 옮기는 매개체가 되기 십상이거든요. 상당히 계몽된 형태의 클리셰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p.26
콧: 전에 누가 해준 얘긴데, 예전에는 선생님께서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으셨다고요.
손택: 엄청난 양을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무념무상으로 읽었죠. 전 사람들이 TV를 보듯이 책 읽기를 즐겨요. 읽다가 잠들기도 하고요. 우울할 때 책을 한 권 집어들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래서 GBGB에서 열리는 패티 스미스의 콘서트에 가면 향유하고 참여하고 감상하고 더 잘 경청하죠. 니체를 읽었으니까요. P.67
스타일을 말하는 건 예술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총체성에 대한 모든 담론이 그러하듯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은유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런데 은유는 오도한다. [스타일에 관하여]
은유를 품지 않은 사유란 상상할 수가 없죠. 그러나 바로 그런 사실이 그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0도의 글쓰기죠. 물론 제임스 조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절대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언어에 의미들을 최대한 우겨 넣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은유가 아니라 단순히 언어 그 자체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온갖 다른 뜻으로 하는 유희가 되어요.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처럼 말이지요. 예를 들어 "강물이 장갑 손가락처럼 다리의 아치 아래를 흐른다" 같은 은유는 보게 되면 딱 알죠. p.101
제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때는 사실 그 사람과 온전히 삶을 같이했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함께 살았고, 연인이었으며, 여행을 다녔고,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했다는 거죠. 저는 동침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해본 적이 없지만, 제가 아는 이들만 해도 동침하지 않는 상대를 사랑했다는 사람이 꽤 많아요. 제게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렇게 들려요. "난 어떤 사람에게 끌렸고 환상을 품었는데 일주일 뒤 그 환상은 끝이 났어"라고요. 그러나 제가 틀렸다는 걸알아요. 왜냐하면 십중팔구 그저 저라는 사람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에 불과할 테니까요.
어쩌면 또 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대변해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아요.
이건 거창한 형이상학적인 관념 같은 게 절대 아니지만, 전 사람들 간에는 오로지 침묵 속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제게 도스토옙스키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싫다고 말하면 이렇게 말해줘요. 잠깐만! 사람들이 질려서 좀 쉬어야 한다고 하는데,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대체 왜 사람들을 쉬게 해줘야 하는 거지? p.173
제 말은, 전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저작에 대해 논하는 게 좀 어려워져요.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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