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최근에 새로생긴 북 카페에서 산 책이다. 섬세한 취향으로 올려놓은 책들이 전혀 없고 베스트셀러와 김영하 같은 한국 작가들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고전류만 넓게 전시되어 있는 서점이 1층에 있었다. 한국에서 본 큰 카페들의 특징들은 베이커리를 같이 두고 있는 것이었다. 고객들이 직접 플라스틱으로 된 쟁반을 들고 넓은 집게를 들고다니면서 빵을 여러 개 담는 그런 풍경도 오랜만에 보니까 낯설었다. 프랑스의 베이커리에선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리들같은 슈퍼마켓에서 구운 빵을 담아 구매하는 게 아니라면.
몇 바퀴를 돌아도 사고싶은 책이 없는 이 서점에서 영어책으로만 본 옐로페이스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다. 너무 괜찮은 작가의 책이라면 영어로 읽을 불편을 감수하고도 시도해 볼 작정이었는데 그런 책은 아니라서 망설였던 책이었다. 도입부를 조금 읽다보니 재밌어서 시원한 카페 라떼와 함께 구매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읽었다. 비가 억세게 내렸던 날씨가 기억이 난다. 새로 산 책이 가방에서 바로 젖었으니 말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 읽었고 출국하기 전에는 (나도 모르게 귀국이라고 썼다가 10년을 나와 살아도 한국이 내 나라라는 의리가 있으니 출국으로 바꾼다.) 정말 몇 페이지가 안 남았었는데 두고올까 고민하다가 다 읽을 때 즈음이되니 소장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어 캐리어에 넣어왔다.
아테나라는 이름이 여전히 기억날 만큼 이름을 잘 지었다. 주니퍼 송이 저지른 양심없는 표절로 이야기가 시작되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책을 읽다보면 애잔하기도 하고 생생한 감정에 공감되서 오히려 같은 편에 서게 되기도 한다. 흥미진진하고 빠른 전개로 스토리가 이어져서 지루할 틈도 없고, 주니퍼 송이 노골적으로 자기 감정과 아테나에 대한 질투를 솔직하게 털어 놓을 때에는 누구나에게 있는 인간성이 느껴진다. 출판계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아테나가 중국계 작가여서 제기되는 질문들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책이었다.
아테나는 사진 속에서 늘 모델 같았다. 얼굴을 감싸며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도자기처럼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 남들은 모르는 재밌는 얘기를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도톰한 입술, 나를 유혹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아치형 눈썹까지, 외모가 아름다우면 책을 파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특정한 각도와 조명에서만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선책을 택했다. ‘아주 심각하게 제대로 고문당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카메라로 구현하는 건 어려웠다. 멜린다가 보내온 결과물을 보고 나는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속의 나는 재채기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모습, 아니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차마 말을 못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찍고 싶었다. 이번에는 저 앞에 거울을 두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멜린다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기 싫어서 그나마 제일 사람답게 나온 사진을 골랐다. 그리고 수고한 대가로 그녀에게 50달러를 건넸다.
이번에는 워싱턴에 있는 케이트라는 전문 사진작가에게 500달러를 투자했다. 촬영은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내가 태어나 처음 보는 온갖 조명 장비를 사용했다. 나는 그것들이 내 여드름 흉터를 깨끗이 지워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케이트는 활기 넘치고 친절하며 전문가다웠다. 지시는 명확하고 직접적이었다. “턱 당겨요. 얼굴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세요. 이제 제가 농담을 건넬 건데,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렌즈는 신경 쓰지 말고요. 좋아요. 아, 좋아요.”
며칠 후 그녀가 워터마크가 표시된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나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이 너무 예뻐서 놀랐다. 특히 밖에서 찍은 사진이 좋았다. 오후 햇살 아래 멋지게 그을린 나는 어떤 인종이라고 딱히 규정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조용히 옆을 향한 시선은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나는 정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 노동자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낼 법한 작가처럼 보였다. 딱 봐도 주니퍼 송 같았다. p.103
그때 앞줄에 앉아 있던 소녀 하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 좋은 질문이 나오리라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우파 밈에서 사회정의를 외치는 전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염색한 언더컷 스타일의 머리는 덥수룩했고, 헐렁한 비니 모자와 암 워머를 착용했고, 조끼에는 열 개가 넘는 핀과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흑인 인권운동과 반이스라엘 운동,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트레스(미국 민주당 소속의 진보적 여성 정치인)에 대한 충성심을 선언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나를 무너뜨릴 기회를 평생 기다려온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했다. 순간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 앞에서 싸움을 거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저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최후의 전선>을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음, 아주 고통스러운 역사를 많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왜 백인 작가가,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얘기를 써서, 그걸로 이익을 얻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요. 작가님은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쓸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나요? p.150
아테나는 언젠가 <퍼블리셔스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용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는 그들을 기리는 방식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특권과 행운을 누리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습니다. 내 맘대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꾼이 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죠.”
정말이지, 이 발언은 언제 봐도 변명 같다. 꾸며댈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어차피 우린 모두 다 독수리다. 그중 일부가(아테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야기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데 더 능숙한 것뿐이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심장을 손에 넣기 위해 뼈와 연골을 발라낸 후 그 선혈을 보란 듯이 내보인다.
당연히 나는, 관할 노동자들의 소란을 총으로 다스리면 된다는 말을 주고받는 영국 장교들의 이야기를 청중에게 전하면서 찝찝함을 느꼈다. 짜릿함도 없지 않았지만 그걸 입에 올리는 건 왠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따. 아테나의 죽음에 관한 글을 올려 ‘좋아요’를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꾼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의 교차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짝 엿볼 뿐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는 어둠을 “여길 보라!” 하고 외치며 살짝 펼쳐 보이는 존재다. 누구도 분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존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다. p.152
하지만 얘기해보자. 정말, 다른 누구도 아닌 아테나가 그런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을까? 아테나는 한 번에 몇 달 이상 중국에 머문 적도 없었다. 전쟁터에 가본 적도 없었다. 기술직 부모님이 내주는 학비로 영국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성장했고, 여름방학은 난터켓 섬과 마서스 비니어드 섬 같은 고급 휴양지에서 보냈다. 성인이 되어서는 뉴헤이븐과 뉴욕, 워싱턴을 오가며 보냈다. 심지어 중국어도 유창하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미국에 더 잘 동화하기 위해 접에서 영어만 사용했다”고 인정한 적도 있었다.
아테나는 트위터에 접속해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표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모범적인 소수자 신화가 얼마나 기만적인지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시아계는 소득 스펙트럼의 양극단 모두에서 과장되어 있으며, 아시아계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집착의 대상이자 범죄의 희생양이다. 아시아계는 미국의 백인 정치인들에게 선거의 범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 없이 고통받고 있다. 그런 말을 쏟아내고 나면, 아테나는 듀폰트 서클에 있는 집으로 가서 3천달러짜리 골동품 타자기 앞에 앉아 선금을 능가하는 수익을 거뒀다며 출판사에서 보내온 값비싼 리슬링 와인을 홀짝이면서 글을 쓰곤 했다.
아테나는 절대로 개인적으로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고통은 그저 그녀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 전시회에서 보고 들은 걸 바탕으로 한 단편소설로 아테나는 상을 받았다. 제목은 ‘압록강의 속삭임’이었다. 물론 그녀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p.158
얘기를 더 듣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원래 이런 식인 모양이었다. 출판과 관련된 일들은 차라리 기는 게 빠르겠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게 느렸다. 검토자들은 몇 달은 기본으로 원고를 깔고 앉아 있고,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며, 그러는 동안 밖에서는 기대를 품고 기다리다 초주검이 된다. 책을 낸다는 것은, 스타벅스에 줄을 서든 버스를 기다리든 하다가 휴대폰에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릴 때까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p.187
그래, 맞다, 얼마나 안 좋게 보이는지 안다. 나는 테일러 스위프트처럼 백인우월주의자 바비 인형이 될 의도는 전혀 없었다. 분명 나는 트럼프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바이든에게 투표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이 나한테 돈을 던지겠다는데, 그걸 받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인종차별주의자 촌뜨기들에게서 돈 좀 뜯어낼 수 도 있는 것 아닌가?
상황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나는 평판은 잃었으되 퇴출 가능성은 없었고, 한동안 수입이 끊길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만하면 다행이었다. 출판계 연줄은 다 끊겼지만, 인생이 끝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여느 또래보다 저축액이 많았다. 어쩌면 앞서 있는 지금이 그만둬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후 몇 주 동안 종종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두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어쩌면 결국 엄마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만 번드르르한 직업은 나를 위한 카드 패가 아닐 수도 있다. <최후의 전선>을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내겐 어떤 전문 석사학위 과정도 감당할 만한 충분한 돈이 있고, 아이비리그 상위 10위권에 드는 법률 또는 비지니스 프로그램에 지원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높은 학부 성적도 있다. 어쩌면 로스쿨 입학시험 준비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온라인 금융 분석 단기 강좌에 등록해 나중에 컨설팅 분야로 나갈 수 도 있다.
근무 시간과 복지 혜택이 분명한 안정적인 직업이라니, 생각만 해도 매력적이었다. 거기서는 백인이라는 사실이 지루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완벽하게 평균적이고 바람직한 조건으로 여겨질 것이다. 공황 상태에서 스크롤 할 일도 없을 테고, 도토리 키재기 경쟁을 할 일도 업을 것이다. 내 마케팅 담당자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메일을 수천 번씩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삶에 의미를 주는 이 유일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글쓰기는 진정한 마법에 가장 가깝다.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며,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면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이 생긴다. 글쓰기를 그만두는 건 내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으며 서점을 헤짐고 다니는 일도, 서가에 그 책들을 올리기까지의 긴 편집 과정에 경탄하며 내 책을 추억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에미 조 같은 아이가 출간 계약을 맺을 때마다, 어떤 젊은 신인 작가가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할 인생을 살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질투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보낼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는 내 정체성의 중심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자기 안으로 침잠하기 시작한 후, 그리고 로리 언니가 나 없는 인생을 살기로 한 후, 글쓰기는 내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줬다. 행여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이 마법에 매달릴 생각이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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