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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다이어 _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4. 10. 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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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다이어 _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리스트에 있던, 읽고 싶던 책이었다. 제프 다이어의 다른 비평책들을 다 읽고 돌아와서 이제야 이 책을 읽는다. 여기서 책을 받고도 한참 아껴두고 있다가 밀라노 여행을 기회로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을 걸 당연하게 예상하고 가져갈 책이라 배낭에서 자리만 차지하지 않을거라는 확신. 다 읽고 밀라노에 사는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올 수 있을 만큼 뿌듯할 만한 책. 어쩌면 10년 전에 읽었더라면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들을. 지금은 그를 통해 본 새로운 장소에서의 감상이나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단 한번 가본 프놈펜이라는 도시의 무기력함을 글로 마주하게 되니 내가 그런 도시들에서 삼킨 이미지가 그런 종류였음을 비교하게 된다. 케이트에 관해서, 그녀의 자유로움에 대해, 능력과 독립성을 통해 보여지는 명백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내가 케이트가 되고 싶을 만큼 황홀한 고백글이었다.    

 


식당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남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 남자가 지배인이었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직업이라는 것이 그저 어딘가로 나가서 여덟 시간 혹은 아홉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근무시간을 다 채우면 집으로 돌아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실외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면 일을 하는 것과 그냥 어슬렁거리는 것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반면 실내에서 일하는 직업인 경우에는 일을 하는 것과 비참한 절망에 빠진 상태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p.46

 

뿐만 아니라 내가 여행안내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놀랄 만한 안내인이라고 해도, 누가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했다. 나 자신의 속도에 맞춰 다니는 걸 좋아했고,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사브라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모두(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면, 그건 몰라도 되는 것들이었다. 나중에 아늑한 집에 돌아간 후에, 아직은 구하지도 않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자료를 찾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p.54

 

도넬리는 늘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엇는 인간인지(얼마나 배신을 잘하는지). 하지만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특이하게도 도넬리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사람, 배신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언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모든 걸 종합해보면, 그가 내 친구였다는 뜻일 것이다. 나처럼 살다 보면, 그러니까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면서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살다 보면 열아홉, 스무 살 시절 대학에서 배웠던 것들을 조금씩 까먹어가며 살아갈 나이가 되어도 새 친구들을 만드는 일이 낯설지 않다.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것들 중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p.91

 

제이크와 체스도 자주 뒀는데, 제이크의 실력은 개리스가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최고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제이크는 교도소 체스 챔피언 같은 스타일이어서, 정교함은 없지만 물불가리지 않는 공격과 종종 거의 반칙에 가까운 수를 서슴지 않고 두면서 상대를 당혹케 하는 기술이 뛰어난 선수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개리스는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신중하게 계산하고 수를 던지는 심사숙고형이었다. p.107

 

나는 그녀가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범한 얼굴이 일 분에 서너 번씩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얼굴 뒤에는 그녀의 자유로움이 지닌, 그녀의 능력과 독립성이 지닌 명백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오늘 오후에 겪은 일 따위로는 흔들릴 수 없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었던 그 어떤 일도 흔들지 못한 자유로움과 능력과 독립성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내가 종종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은 여성에게 빠져들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의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 특별한 익숙함(거의 부수적인 효과라고 해야겠지만)을 알아본 후에야 내가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절하게도 그 깨달음은 일종의 현기증(기절할 것 같은 아득함)처럼 다가왔다. 그녀에 대한 나의 갈망과, 그녀 쪽에서는 나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직감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현기증이었다. 스테이크만 한 농어를 다 먹은 그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가서 상처에 침을 좀 발라야 해서요.”

여기까지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케이트를 만나게 된 경위다. p.113

 

사십 대가 불꽃과 야망,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찼던 이십 대보다 낫다. 심지어 한때 당신을 움직이게 했던 그 희망들이 고통의 원인이 되어버렸던 삼십 대보다도 낫다.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내가 말했다. p.149

 

비행기는 프톰펜 행이었다. 사이공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그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거리에는 북아프리카 도시들에서 느꼈던 황폐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그저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 빼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곳, 살아남는 일과 말없이 순종하는 일 이외의 다른 것에는 재능을 쓸 수 없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도시의 황폐한 인상이 더욱 굳어지는 그런 곳 말이다. 무기력만 강하게 느껴지는 곳. 어쩌면 그건 단순히 더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은 없었고, 불빛 없는 거리에는(딜런이 로마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잡석들만 가득했다. p.183

 

나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일에 정신이 팔렸다. 온갖 것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밀려들었고, 덕분에 그 어디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무것도 확실히 내 마음을 잡아주지 못했다. 밖에 있으면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고 실내에 있으면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가장 심할 때는 일단 좀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인생을 허비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때문에 성지에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그 남자, 트로이처럼 되어가는 것 같았다. 도무지 안정이 되지가 않았다. 어딘가에 앉아서 그렇게 앉아 있는게 당시 내가 가장 원했던 일임을 확인한 후에도 몇 초 만에 그 상황을 조금 더 만족스럽게 해줄 무언가가 없을까 고민했다. p.250

 

 

여전히 니체의 말들이 술렁였다. 니체는 기도란 어리석은 사람들이 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주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소란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거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오늘날 성지에서는 사진기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손에 뭔가 할 일을 주는 역할 말이다. 물론 내게는 사진기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거기 ‘있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기도에 임하는 자세는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불상의 엄숙함 앞에서 나는, 앞서 이야기한 그 지리하고 절망적이었던 시기, 실망과 후회에 지쳐 어떤 일에서든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그 시기에도, 킹스크로스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던 일을 떠올렸다. 몇 주 동안 기다려온 파티에 가는 중이었는데, 핌리코 역에 도착할 때쯤 갑자기 파티에 가기가 무서워지고 집에 돌아가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건너편 플랫폼으로 가서 남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스톡웰쯤 왔을 때 다시 아파트에 혼자 있을 걸 생각하니 끔찍해졌다. 나는 또다시 북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빅토리아 라인을 아래위로 오가며 같은 짓을 몇 번이나 했다. 정신과 의사가 당시 시시티브이 화면을 봤다면 내가 조만간 기차 밑으로 몸을 던져버릴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나는 선로에 뛰어내리는 대신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을 반복했고, 결국(워렌스트리트 역까지는 어찌저찌 갈 수 있었다) 자신을 추스린 다음 남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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