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이 길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곳.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정작 캐리어를 싸는건 손도 못댔다. 어제 시내를 나간 것을 마지막으로 선물사는 일도 마무리했고 짐만 싸면 되는데 이사를 오느라 여러 캐리어에 물건이 가득한데다가 몸이 찌뿌둥한지 오후엔 점심먹다가 별 소득없이 넷플릭스에서 가벼운 영화를 한편 다 봤다. 침대에 잠깐 누워있었다. 그러다 노트북을 켠다. 한국에 가기전에 일기를 써놓고 싶기도 했고, 마음을 정돈하고 싶기도 하다. 마음편히 쉬고오는 그런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시간으로 한국에서 채울 것이니 지금이라도 여러 고민들은 잠깐 내려놓는다면 리프레시된 정신으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Le courage n'est pas l'absence de peur, mais la capacité de la vaincre.
정보와 지식의 차이. 언젠가부터 이 질문을 던지며 여러 책이나 인터넷 웹서핑을 하면서도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과 지혜의 형태로 옮겨가려면 어떻게든 글로 내 생각을 다시 입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요즘말로 인풋과 아웃풋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아웃풋이라는 정의가 직접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사고의 발전이라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오전에 흘려들은 팟캐스트에서는 어떤 책에 대한 비평으로 소설을 읽는 이유는 apprendre(배우게)가 아니라 comprendre(이해하게)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내가 읽는 소설들도 그런 방식으로 과연 나에게 도움을 줬을까? 무엇을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일로 미팅을 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소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나온 것 처럼 구체적인 묘사가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아직도 인상깊게 남은 정 반대의 두 남자가 있다. 두 사람 다 오뜨꾸뛰르 코트를 근사하게 걸쳐입고 왔었다. 한 사람은 정확하게 원하는 실루엣이나 안감디테일, 심지의 touche까지도 언어화해서 소통을 했던 사람이었다. 두번째 남자는 에르메스 스카프를 목에 탁 감고 있었는데, 멍청한 사람들은 눈빛부터 초점이 풀려있다. 시시콜콜 디자이너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서 이사람이 굳이 여기까지 직접 올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엔 에르메스 스카프마저 돼지 목에 리본과 진주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이 두 남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본인이 원하는 것 또는 업무를 정확히 알고 처리하냐 마냐의 문제다. 첫번째 남자하고만 함께 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만 펼쳐지지는 않으니까. 직장생활이라는게 동료와 함께 원만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에 두번째 남자 같은 사람들과도 인내심을 가지고 태연하게 웃으며 보내야하는 걸 불같은 성격에 참 쉽지 않다.
"독신생활에는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인지에 관해 그릇된 자아상을 지어내는 습성이 있다. 라비는 내적 혼란을 느낄 때 강박적으로 정리정돈을 하고, 일로 불안을 물리치려고 하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을 딱 부러지게 표현하지 못하고, 즐겨입는 티셔츠를 찾지 못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2.
보통은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집에 들어오는 길에 장을 봐와서 집안살림을 이어갔는데 이사를 오고나서 한번은 크게 장을 보러 가야 해서 일요일 아침에 마트가 닫기 20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시간이 부족하니 입구에서부터 갈라져서 고르기 쉬운 것들, 휴지, 우유, 계란은 피에르가 찾으러 갔고 나는 식료품을 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트의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저렴하지도 않아서 다음번엔 오셩으로 가보기로 한다. 이 큰마트에서 어떻게 마감시간에 맞춰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는지 궁금했는데 입구에서 장바구니에 번호를 메겼던 흑인 세큐리티 아저씨가 마트의 가장 안쪽에서부터 사람들을 쫓아냈다. 점점 그 간격이 입구쪽으로 향하는데 내가 요거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아저씨가 여기서 더이상 뒤로 못갑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요거트는 아쉽지만 그렇게 썰물처럼 사람들을 내쫓는게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피식나왔다. 마트의 바로 앞에 시장이 열렸는데 과일이나 야채보다도 생선을 여기서 사면 참 괜찮겠다 싶었다. 빵을 파는 아저씨한테도 종류별로 주문했다. 파리의 유명한 파티셰가 만든 타르트보다 이렇게 시골 사람이 와서 깨스 통째로 풀어놓고 파는 그런 빵들이 훨씬 정감있다. 시골할머니같은 푸짐한 사과가 올려진 타르트를 하나 사서 오후에 스타벅스에서 공부하면서 먹었다.
공부하면서 슬슬 저녁에 뭘 할지 찾아보다가 근처에 낸골딘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었다. Toute la beauté et le sang versé. 제목과 l'affiche만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시놉시스에 낸골딘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비오픽과 현재의 투쟁이 함께 나란히 오버랩되면서 진행되는 시나리오가 좋았다. 익숙하게 많이 봤던 그녀의 사진들을 집중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현대미술관에서 진단서를 뿌리는 단체 시위는 일종의 행위예술 같기도 했다. 서로 신호를 보내고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넓게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 꼭대기에서 진단서가 휘날리면서 뿌려지고 전시의 관람객들도 호응을 해주는 모습에서. 그런 아름다움에 눈물이 났다.
3.
내가 마주하는 매일의 일상이자 이곳의 모습이 담긴 두 사진이다. 매일 점심시간 항상 지나가는 길. 지하철에서의 lecture. 한동안 청소부들이 파업을한다고 쓰레기차가 지나다니지 않고 있는데 그게 또 몇 일 묵으니 사람들이 지나가려면 쓰레기를 피해서 한줄로 피해다녀야 했다. 가끔 젠틀한 남자들이 쓰레기쪽으로 자신이 등돌아 서며 길을 터주기도 했다. 일상에 작은 불편함을 주지만 어쨌거나 연대의 한 모습으로, 투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회.
4.
3월은 일로나와 마리옹의 생일이 있다. 일로나와 딱 어울리는 불리에서 바디로션을 샀고 향도 향이지만 패키지가 너무 예뻤다. 아주 오래 전에 불리매장앞에 처음 지나가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일로나와 만나기 딱 몇일 전에 퇴근을 일찍하고 마레에 걷다가 지나쳐서 들어가서 바로 샀다. 생일저녁은 강가의 뻬니쉬의 식당이었는데 치즈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식당에 가면 보통 생선을 시키지만 그래도 여기선 치즈를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퐁듀를 시켰다. 처음보는 일로나의 오빠가 있었는데 불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웃으며 루마니아말을 따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루마니아어 발음이 이렇게 좋은 외국인은 처음 본다면서 칭찬을 해주니 더 신나게 단어들을 따라했다. 물론 지금와서 기억나는 단어는 하나도 없지만. 와인을 쉴새없이 마시고 디제스티브도 들이키다보니 어느순간 너무 취해서 한동안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물과 커피를 번갈아 마시다가 차를 얻어 타고 집까지 왔다. 뒷자석에 일로나 옆에 기대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은채.
5.
아직도 우리집이 익숙하진 않지만 차차 나아지고 있다. Bibliothèque를 설치해서 책을 다 꽂아놓고 내 물건을 전부 정돈해 놓아야지 비로소 내 집이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소파가 아직 없어서 각자 노트북으로 할일이 있을 때에는 피에르를 부엌테이블에 보내놓고 나는 테이블을 차지했다. 이제는 나의 집이 여기에 있으니 이번 한국의 일정이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게 적당히 짠 것 같다. 한달 반 정도를 비울 필요도 없고 와서 다시와서 할 일도 있으니.
이번엔 직원도 한명 비어있어서 특별히 컬렉션 기간 일주일동안, 플러스 파업때마다 택시를 탔다. 지하철에 앉아서 책읽으면서 가는 것도 좋지만 두 번씩 갈아타면서 서서 가는 출근길보단 택시로 출퇴근 하는것이 피로도가 훨씬 적었다. 왕복으로 매일 80유로씩 나와도 청구하면되니까.
6.
라마단 기간동안 할랄음식을 하는 쿠스쿠스가게나 식당들에선 내부에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걸 눈치챘다. 해가 지기 전까지 음식을 먹으면 안되니까. 대신에 특히 이런 식당들이 많은 골목에서는 모든 가게가 매대를 밖에 내놓고 테이크아웃으로 장사를 했다. 라마단을 하는 사람들이 집에서 가족들과 먹도록 파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나름 그들의 축제이기도 하니까.
올해의 빨레호얄의 목련은 못 볼 줄 알았는데 근처의 오피스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치며 보게되었다.
The MET (0) | 2023.06.30 |
---|---|
Rue du Chat qui pêche (0) | 2023.06.27 |
한국휴가 (1) | 2023.04.28 |
HOME (0) | 2023.03.11 |
Retour à Séoul (5) | 2023.01.3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