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겁게 노트북을 가져와서 짐만 되었지만 가끔 넷플릭스를 봤고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20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한국에서만 살 수 있는거라는 핑계로 쇼핑은 잔뜩했고 카드값의 앞자리가 바뀌면서 조금 불안했지만 대만에서는 유로로 긁었으니까 어느정도 분산이 되었다. 올초에 큰대출을 받으면서 당장은 재정적으로 빠듯해 부모님께 용돈도 제대로 못드렸다. 아빠가 마지막날에 나에게 용돈이라고 현금을 줬는데 동생이 우리가 대만의 타오위안공항에서 현금을 다 쓰고 온 것처럼 나도 인천에서 나가면 소용이 없다면서 같이 말렸다. 반은 도로 드리고, 반은 그날 저녁을 다같이 먹었다.
친구들에게 많이도 얻어먹었다. 내가 좋아할 선물도 건네받고, 택배로도 받고, 우리집 문 앞에다가 걸어두고 간 한슬이도 있고. 민서는 마지막까지 우리집으로 아이스박스에 담긴 속초 오징어젓갈을 보내줬다.
프랑스에 돌아와서 다시 삭제하기는 했지만 한국에 지내는 동안엔 한국용 어플을 많이 설치했다. 구글맵이 아닌 카카오맵, 카카오택시, KTX기차권을 발매할 수 있는 어플 등. 다슬이와 하동으로 여행을 갈 때에는 부산왕복으로 버스티켓을 미리 끊어서 나에게 승차권을 보내줬고, 경진이도 서울에 몇시쯤 도착하는지 묻는 문자와 함께 어차피 어플도 없을 것 같다며 티켓을 보내줬다. 마음이 든든하다. 이민을 오면서 떨어진 거리만큼 친구들과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곤 그저 서로의 상황들이다. 졸업하고나서 각자 먹고 살아갈 길을 찾아갔으며, 한국에 있거나 더욱이 지방에 지내기 때문에 편안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치열하게 고민하며 지금도 이직이나 재취업 등 어떻게든 삶을 지탱할 방법을 찾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나만 엄살을 피운 것 같아서 위로도 되었다.
대학졸업 이후에 네이트는 일본으로 떠났고, 나도 그즈음에 한국에서 나왔으니 오랫동안 얼굴을 못봤다. 한국의 일정을 비행 스케줄부터 얼추 맞춰서 하루를 서울에서 보게 되었다. 대학생활의 일부를 크게 차지했던 사람. 항상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궁금해 Person’이라는 애칭도 붙여준 사람. 신당역 지하의 락커룸 앞에서 근 10년만에 얼굴을 보자마자 ‘너 되게 늙었다’ 라는 진담반 농담반 섞인 장난을 먼저 던지게 하는 사람. 알고보니 네이트의 집안이 굉장히 부자였는데 어렸을땐 왜 눈치를 못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때 네이트와 연인으로 발전했다면 그와 같이 미국에서 편하게 살고 있을까? 같은 얄팍한 생각도 잠깐 들었는데 어쩌면 어릴땐 그런 것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던 때여서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어쨌거나 대신에 평생 함께할 든든한 친구로 계속 지내게 될터이다. 미국지도에서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뉴멕시코에 그를 보러가는 날도 오겠지.
강릉에서 제일 편했던 건 어떤 친구든지 부르면 차를 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좋은 곳으로 데려갔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한 뷰가 근사한 카페나 오랜만에 먹는 푸짐한 조개구이도 좋지만 차 조수석에 앉아서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순간들이 벌써 그립다. 우리가 만난 바로 다음날 클라이밍을 하러 속초에 가고싶다는 말에 선뜻 나서준 고은이와 국도를 달리며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둘 밖에 없는 그런 공간에서.
2.
떠나기 며칠 전, 파리의 지하철.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편의점에서 사먹은 것. 김밥이 먹고싶었으나 편의점김밥으로 첫 만찬을 망칠 수 없기에. 비싸다고 생각했던 편의점 음료들이 유로로 환산해보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체감상 1500원이 여기서 쓰는 1유로보다 훨씬 큰 돈 같은 느낌은 여전하다.
2.
다슬이가 짜온 계획에 따라 하동지역을 여행했다. 이름만 들어본 화개장터와 쌍계사를 갔고 틈틈이 지역의 맛집도 다녔다. 한국을 그리워하던 나를 위해 오로지 한식만으로, 한옥스테이만으로 짜여진 플랜에 몸만 따라다녔다. 둘쨋날 묵었던 한옥스테이의 사장님은 우리에게 차를 대접했고 옆방에서 묵었던 언니들과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다. 술잔을 기울이듯이 작은 찻잔에 수십번도 넘게 차를 채웠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차를 마신 적은 처음있는 일이다. 사장님이 와이프와 이렇게 차를 마시고 다니면서 물고문을 많이 당했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이나 물을 쉴새없이 마셨다. 화장실에 두번이나 다녀오고나서 서너시간이 넘는 저녁의 티타임은 끝이났다. 넙적하고 둥그렇게 종이로 감싼 대만의 좋은 차를 이렇게 많이 마실 일이 또 있을 까 싶다.
3.
센스있는 그녀들과 강릉에 새로생긴 호지스테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처음에는 숙박비가 비싸서 놀랐고, 그래서 어떤지 너무 궁금했다. 팔각집의 가운데를 공간을 버리면서도 나무 한그루를 심고 풀이 자라게 놔둔 정원으로 꾸며놓았는데 이런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첫번째 침대를 지나 두번째 방으로 지나가면서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부분을 팔각형의 한 면으로, 나무가 아닌 돌 표면으로 부드럽게 노출된 것도 재밋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부드러운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던 거였는데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이태리브랜드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곳에 쓰인 비슷한 나무느낌으로 제작한 듯한 등받이 기울기가 애매하게 낮은 딱딱한 의자는 보기만해도 불편했으나 앉아있을땐 더 불편했다.
얼른 파리의 우리집에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예쁜 선물들도 받았다. 한밤중에는 커다란 수박 한통을 잘라서 나눠먹었으며, 루미큐브를 하고, 침대에 모여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4.
작년즈음 프랑스에서 운전면허 전환을 신청하면서 기존의 한국면허증을 제출했다. 급한일이 있을때 엄마가 대신 업무를 봤으면 해서 신분증을 하나라도 놔두고 싶어서 면허증을 재발급 받았다. 당연히 증명사진이 필요할 줄 알고 동네 사진관에서 급하게 사진을 찍고 나갔는데 재발급은 사진을 못바꾼다고 하더라. 기계의 회색빛 플라스틱 재질부터 아주 오래 묵은, 후지에서 나온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프린트로 사진을 뽑아주던 동네 사진관에서 사진이 현상되는 동안에 운동 전문가가 나와서 몸에 좋은 스트레칭을 시연하는 시덥잖은 아침프로그램에 흠뻑 집중해서 봤다. 다른나라에 여행을 가면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나라가 어떤지 궁금해지는 것처럼, 한국의 텔레비전을 안본지 오래되서 집에서 오히려 노트북이 아닌 텔레비젼을 보려고 했다. 옛날보다 드라마를 볼 때 광고가 나오는 빈도수가 훨씬 늘었으며, 잇몸이나 관절에 좋은 약들, 자동차나 세탁기 등의 광고가 많았다. 놀라운건 예능프로그램의 유행이 어떻게 이렇게 획일화 되었냐는건데 연예인들이 맛집을 다니면서 먹는 것을 보여주는 쇼 아니면 해외여행을 가는 것(특히 접근성이 좋은 동남아) 둘 중 하나였다.
5.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한 대만여행. 엄마와 다니는 만큼 대중교통은 거의 타지 않았고 거리가 있을 때에는 우버를 불러서 편하게 움직였다. 딤섬과 우육면 등 유명한 것들도 먹었고, 이틀동안 연달아서 마사지도 받았다. 우여곡절끝에 버스를 타고 반나절은 지우펀에 갔다왔다. 베트남의 호이안에서처럼 한국인들이 쏟아져나왔다. 사진을 찍을 때에는 아예 한국인들끼리 서로 부탁을 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늦은시간에 우버는 안잡히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버스터미널에서 줄이 너무 길다는 것을 보고 한정거장 앞질러 간 터미널까지 빠른걸음으로 걸어 도착해서 운좋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엄마여권에 내가 데리고 다닌만큼 도장이 찍혔다. 그래서 다음에 한국에 올 때에는 일본에 같이 가기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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