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몇몇 문단에서 콧대높은 동부인인 데이빗의 감수성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사회적 계층을 넘나들며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글을 쓰는 그의 세계관이 나에게 어지간히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부류로 구분짓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규범을 무시하고 솔직해 지는 그의 문장들을 보면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데이빗이 묘사한 케이마트족 남부의 백인들은 최근에 읽고있는 Édouard Louis 에세이 속의 village의 모습과도 굉장히 닮아있다.
이 일을 한 지 5년 됐고 그동안 지금있는 회사에 소속되어 일했다고 한다. 이 일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잘 모르겠다고 한다. 뭐랑 비교해서? p.33
큰 버트네 부리토, 매운 이탈리아식 소고기 요리, 매운 뉴욕식 소고기, 조조스 튀긴도넛 (커피를 팔고 있는 유일한 부스), 기왓장만한 피자, 돼지 곱창..(일리노이주 시골은 어떤 민족적 특색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당혹스러울 만큼 풍족한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이 여기서 나타난다. 우리는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유래한 음식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재빨리 튀겨서 종이 접시에 제공하며 걸어다니면서 섭취한다.) p.43
끝없는 군중에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둘러싸여 있지만 아무도 불편해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눈을 부라리지 않는다. 토박이 친구는 발을 밟히면 욕하고 웃는다. 그러나 이런 소 떼 같은 군중의 모습에, 즉 각자 다른 목표를 향해 밀치락달치락하며 이동하는 동안 수백 쌍의 손이 종이 접시와 입을 오가는 모습에 내 안의 동부인 감수성이 근질거린다. p.45
하나같이 두리번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먹고있는 축제 관람객들의 살갗의 바다. 이 관람객들은 이미 긴 줄이 늘어져 있는 사람 많은 곳만 찾아다니는 것 같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해 다니는 동부식 게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중서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약은 데가 없다.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이들은 마치 길 잃은 아이들 같다. 하지만 누구도 인내심을 잃지 않는다. 왠지 어른스럽고 매우 핵심적일 수도 있는 깨달음이 온다. 축제에 온 관광객들이 왜 군중, 줄 서기, 소음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지, 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축제라는 어린 시절의 특별한 느낌이 이제 없는지 알 것 같다. 이 주 축제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렇다. 나만을 위한, 너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다. 이 축제는 군중과 부대낌, 소음, 시각적, 후각적, 선택지, 행사의 과부하를 의도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가설: 동부의 메갈로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름휴가란 말 그대로 훌쩍 떠나는, 날아가는 일이다. 군중과 소음, 열기, 더러움, 너무 많은 자극에서 오는 신경의 피로함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그래서 산, 유리같이 맑은 호수, 산장, 고요한 숲에서의 산책을 찾아 환희에 넘치는 도피를 한다. 다 잊고 떠나는 일. 동부 사람들 대부분은 평소에 자극적인 사람들과 광경을 월~금 실컷 본다. 줄을 실컷 서고 살 것도 실컷 사고 군중과 실컷 부대끼며 구경거리도 실컷 본다. 네온 스카이라인. 110와트 음향 시스템을 장착한 컨버터블. 대중교통에서 마주치는 역겨운 광경들. 모든 도시 모퉁이마다 멱살을 잡다시피 주의를 끄는 구경거리들. 따라서 동부인에게 실존적 인물은 자극과 한정된 공간에서의 도피, 침묵, 움직이지 않는 시골스러운 풍경, 내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떠나는 것이다. 중서부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거의 항상 떠나 있다. 땅덩어리는 크고 당구대처럼 평평하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도시화된 스프링필드만 봐도 집들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마당이 얼마나 넓은지 보라.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와 비교해보라. 여기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앉아서 갈 수 있고 공원은 공항만큼 크다. 막히는 출근길에는 일시 정지 표시에서 3초나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농장은 거대하고 고요하며 대부분 텅 빈 공간이다. 이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리노이주 시골사람들의 휴가 욕구는 무언가를 향하여 도피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모이고 녹아들고 군중의 일부가 되려는 충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땅과 옥수수와 위성TV, 마누라의 얼굴 말고 다른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p.53
매정한 말이기는 해도 흔히 케이마트(미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 족이라고 불린다. 좀 더 남부로 내려가면 백인 쓰레기의 특정 분파로 분류될 것이다. 케이마트족은 대개 비만이며 합성섬유만을 입고 표정이 근엄하며 멍한 얼굴의 불행해 보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 부분 가발은 반짝이고 네모난 모양으로 너무 티가 나서 애처로울 지경이며, 여자들의 경우 화장이 촌스럽고 종종 비대칭적이라 어느 실성한 사람의 얼굴 같다는 느낌을 준다. 목소리는 칼칼하고 식구들은 서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아이들을 철썩철썩 때리는 부류들이다. p.74
이 모든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암담하다. 부스의 계산대에 있는 여성은 1968년도 청년국제당원처럼 옷을 입었지만 얼굴은 카니발 일꾼처럼 굳어 있고 내가 왜 티셔츠의 문구를 외우고 서 있는지 궁금해 한다. 내가 겨우 꺼낼 수 있는 말은 “맥주 2.5잔” 어쩌고 하는 티셔츠에 적힌 “성적 흥분”의 철자가 틀렸다는 것뿐이다.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라고는 백악관에 공화당원이 들어가는 것과 이동식 주택의 무늬목 선반에 엘비스를 그린 검은 벨벳 그림을 놓는 것밖에 없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이들에 대한 기호학적 가설을 펼치고 있다니 나는 정말 콧대 높은 동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들 가운데 3분의 1은 족히 이런 티셔츠를 입을 것이며 그것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닐 것이다. p.77
촬영과 음향, 분장팀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들도 다수가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다. 삼십대 정도의 나이에 화장기 없는 무심하게 예쁜 얼굴, 물 빠진 청바지와 오래된 운동화, 검은 티셔츠. 거추장스럽지 않게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풍성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가끔 삐져나와 흘러내리기 때문에 눈앞을 가리지 않도록 자꾸만 치우거나 반지를 끼지 않은 손등으로 쓸어 넘겨야 한다. 다시 말해 단정하지 않지만 예쁘고 첨단 기술에 밝으며 대마초를 피우고 개를 키우는 게 분명한 젊은 여자들이다. 이런 현장 기술 인력 여성의 대부분은 눈가에 어떤 특징적인 표정이 어려 있는데 그 표정은 “안 가본 데가 없고 안 해본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드러나는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태도를 전달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들 가운데 일부는 두부밖에 먹지 않고 일부 그립이 두부의 모양새에 대해 하는 말에 대꾸할 가치조차 없음을 명확히 한다. 여성 기술 인력 중에는 영화 제작 상황을 스틸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수전이 있다. 수전은 키우는 개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할 줄도 알고 팔뚝 안쪽에는 ‘힘’을 뜻하는 일본어도 문신으로 새겼다. 팔뚝근육을 움직여서 이 문자가 니체적으로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도록 만들 줄도 안다.
각본팀과 의상팀, 그리고 제작 보조도 다수가 여성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류에 속한다. 더 젊고 덜 말랐으며 더 취약하고 첨단 기술에 밝은 촬영이나 음향 쪽 여성이 가진 자부심이 없다. 현장여성 인력이 염세적인 멋을 가졌다면, 각본팀과 제작 보조 여성은 모두 “그렇게 좋은 대학 나와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락 자문하는 듯한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심리 상담을 받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럴 돈이 없어서임을 알 수 있는 눈빛 말이다. p.161
가장 중요한 예술적 소통은 지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진정한 매체는 언어가 아닌 영상이며, 그 영상의 경향이 사실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표현주의든 초현실주의든, 무엇이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진실로 느껴지느냐, 전달받는 사람의 마음의 마음속에서 대박을 터뜨리느냐 하는 것이다. p.194
로라팔머는 ‘선한’ 동시에 ‘악하고’ 또한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로라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실제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 속에서 이런 가능성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둘 다’인 것을 싫어한다. ‘둘 다’는 게으른 묘사, 모호한 연출 같고 초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트윈 픽스>의 로라는 그런 이유에서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린치가 만들어낸 모호하게 ‘둘 다’인 로라를 우리가 비난하고 싫어한 이유는 이렇다. 로라에게 감정 이입된 우리는 모호하게 ‘둘 다’인 우리 자신과, 친밀한 주변인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 다’인 도덕적 자아가 있는 현실 세계는 우리를 긴장시키고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는 그 세계를 한두 시간 쯤 벗어나보자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과 세상의 여러 양상들을 환상을 통해, 판단을 통해 없애주거나 주물러 편안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확신시켜주고 더 나아가 우리가 여주인공과 맺은 정서적 관계로 끌어들이는 영화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화를 돋운다. p.210
맨 마지막에 실린 글은 특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시아 오지크의 재너두에서 나오기를 말하는 듯 하다.) 이 에세에이에서 오지크는 청년시절 겪었던 깨우침의 순산들에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기막히게 아름다운 언어 예술이기도 하지만 ‘완전 소음’의 맥락에서 자유롭고 교양 있는 성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 본보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오류 혹은 우둔함을 알아볼 수 있는 지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흡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그래서 용감하게 그다음의 밝혀진 오류로 갈 수 있는 겸손이 있는 삶이다.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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