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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2. 9.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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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CRYING IN H MART

 

내가 생활을 해온 베트남과 프랑스에서 한국마트를 주로 K마트라고 불렀다. 생각해보니 주황색로고가 들어간 것도 두개가 비슷하다. 4월에 뉴욕에 있으면서 거기선 한국마트를 H마트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코리안타운에서 구경하러 들어갔을 때 밥솥이 족히 30개정도 종류별로 진열된 걸 보고 입이 떡 벌어졌었다. 뉴욕에서 제일 좋아하는 서점인 192BOOKS에서 빨간색 표지의 Crying in H mart라는 타이틀의 붉은색 책을 발견했다. H마트의 존재를 몰랐다면 집어들지 않았을 책이다. 흥미롭게도 이민자 2세대인 미셸자우너라는 작가가 쓴 책이었다. 음식이야기로 둔갑하며 아픔을 감춘, 죽은 엄마를 애도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책이었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가 자신의 반쪽인 한국을 흡수한 성장과정을 보여준 면도 좋았다. 한 3분의 1정도가 지나면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페이지가 슬퍼지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턴 너무 울어서 어느밤에는 노랫말처럼 정말 눈물이 눈앞을 가려 활자를 읽지못할 정도까지 펑펑 운 적도 있었다. 그러다 멈춰서 다시 읽기도 하고. 이 책을 읽기시작하면 다시 울어버릴걸 알고있어서 창가의 쇼디에 위에 올려놓고 이 자리에서만 읽었다. 한국어책은 주로 집에서 읽는 편이지만 그렇다해도 이 책은 어디 카페에 들고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떨 때는 울고 싶을 때 이 책을 집어들기도 했다. 엄마가 우리집에 와있을 때 파리지앵 아파트가 한 껏 따뜻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현진이는 엄마가 뉴욕에 왔을때 다른 것보다 누군가 나를 챙겨주는 느낌을 너무 오랜만에 받아서 뭉클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역시도 오롯이 그런 감정이 들었다. 연인인 피에르에게 애정을 받는 것과는 다르게,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기 때문에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는 그와는 다르게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더 사랑하기 때문에 듣기 싫은 말도 더 해서 나의 흠도 더 바로잡아 주는 사람. 휴가동안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게 그리도 싫었는데. 엄마가 요리하는 음식 냄새로 잠에 깨는 그런날도 있었고, 출근하면서 그래놀라에 뮤슬리로 아침을 떼우던 나는 어디있나 싶을 정도로 흰쌀밥에 반찬을 맛있게 먹었다. 엄마와 붙어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려고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 옆에 꼭 누워서 전날 같이 찍은 사진을 보기도 하고 그날 할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다 다시 잠들곤 했다.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호밀밭의 파수꾼’ 구판본도 건네주지 않았고,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이든 뭐든 내가 문화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학습 모델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의 방식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두 분은 세상을 실컷 구경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원 없이 맛보았다.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을 만회했다. 나는 순대며 생선 내장이며 캐비아 같은 음식을 마음껏 맛보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면서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p.44

 

아빠는 우리 사이가 멀어진 게 일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열 살 때 큰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인수한 뒤로 아빠 일이 꽤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아빠가 그즈음에 우리 가족의 첫 데스크톱컴퓨터를 장만한 게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아빠는 종종 온라인으로 여자들과 성매매 약속을 잡았다. 나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됐고 평생 그걸 엄마에게 비밀로 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아빠의 외도를 재빨리 합리화할 줄 알았다. 아빠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고, 아마도 엄마에게서 암암리에 묵인을 받아낸 것이리라고. 하지만 내가 나이들수록 그 비밀은 더 큰 상처가 됐다. 아빠가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짜증스러워졌고, 아빠의 폭력적인 과거가 이제는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 약점에 대한 변명처럼 들렸다. 계속 맨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는 모습도 더는 정이 가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직접 차를 몰아 집에 오는 것도 무책임해 보였다. 아이였을 때 기쁨을 줬던 것이 어른이 된 내가 아빠에게서 얻고 싶은 것을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우리는 나와 엄마처럼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사이가 아니었고, 이제 엄마가 아픈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같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p.128

 

엄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한국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시에 엄마는 한동안 몸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고,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지금은 죽어가기보다는 살아가기를 선택할 때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자신의 조국과 언니에게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갖고 싶어했다.

“서울엔 네가 아직 못 가본 작은 시장들이 있어.” 엄마가 말했다. “광장시장 같은 데. 거기선 고릿적부터 아주머니들이 빈대떡이랑 갖가지 전을 부쳐서 팔고 있지.”

나는 눈을 감고 눈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서울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다. 녹두 반죽이 기름에 지글지글 지져지고, 고기 패티와 물기를 쫙 뺀 굴에서 계란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엄마가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볼 시간이 앞으로 더 많다고 생각했던 모든 장소를 내게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p.202

 

오른손에 엄마의 반지를 끼고 있으려니 꼭 어른처럼 화장한 다섯 살짜리 꼬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엄지로 반지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편안한 느낌을 가져보려 애를 썼다. 내 둔한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헐렁한 반지가 새벽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손이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상실을 상기시키는 무게감, 손을 들어올릴 때마다 나를 훅 잡아 당기는 무엇이었다. p.263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p.268

 

“이제 우리가 서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돼서 너무 좋지 않아?”

대학생 때 언젠가 집에 와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10대이던 시절에 서로에게 입힌 어마어마한 상처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였다. “좋아” 엄마가 말했다.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야.”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 키우고 나와 18년을 한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송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p.285

 

 

그래서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이 엄마의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 결실을 맺지 못한 열망, 처음으로 읽은 책,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난 과정, 온갖 불안과 작은 승리. 엄마는 비할 데없는 관심으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p.372

 

“우리 엄마 한국 사람, 아빠 미국 사람”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눈을 감고 입을 크게 벌려 “아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찬찬히 살폈다. 어떻게든 한국인다운 부분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참으로 아이러니 했다. 한때 그토록 백인 친구들과 닮기를 갈망하고 한국적인 면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던 내가, 지금은 목욕탕에서 만난 이 낯선 사람이 그 한국적인 면을 바로 못 알아보는 것이 이토록 두렵다니.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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