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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_ 테드 창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2. 1. 11.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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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_ 테드 창

 

애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블루감마 사의 방침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올바른 것이었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젝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면서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설령 그런 경험 전체를 스냅숏으로 찍어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그 복제들을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을 통해 태어난 모든 디지언트는 각자 하나의 생애를 살아왔을 것이다. 한때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소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p.235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p.288

 

우리 언어에는 당신 언어의 ‘사실’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옳을 때는 ‘미미’라고 하고, 정확할 때는 ‘보우’라고 합니다. 분쟁이 벌어지면 당사자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합니다. ‘미미’를 말하는 거죠. 하지만 증인들은 정확히 사실 그대로를 말할 것을 선서하기 때문에 ‘보우’를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을 때, 사베는 어떤 행동이 모두를 위한 ‘미미’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미미’를 말하는 한, 그들이 ‘보우’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p.307

 

“내가 너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구나.”

니콜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에게 필요한 만큼은 알고 있을걸요?”

이 말도 내 가슴을 찔렀지만, 나는 불평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넌 좋은 딸이야.”

니콜은 슬픈 듯이 짧게 웃었다. “있잖아요, 실은 어렸을 때 아빠가 그 말을 하는 광경을 상상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녜요. 안 그래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애가 나를 용서해주고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안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미 한 일을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그러지 않은 척 하는 건 멈출 수 있어. 리멤을 이용해서 나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일종의 재고 정리를 해볼게.”

니콜은 내 말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하지만 이 점은 확실히 해둘게요. 과거에 나를 뭣같이 대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나한테 달려오지는 말아요. 힘들게 겨우 극복했는데 아빠 기분 나아지게 하려고 다시 들추고 싶은 생각 없어요.”

p.321

 

냇 역시 예전에는 비네사처럼 자신의 문제를 언제나 남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아주 오랫동안, 가택 침입죄로 체포된 것도 부모 탓이라고 믿었다. 자물쇠를 새것으로 바꿔놓지만 않았어도, 마약 살 돈을 마련할 물건을 가져가려고 자기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냇이 자기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네사는 아직 그 시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리라. 대신 비난받아줄 데이나라는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나가 비네사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지금껏 자기 삶을 추스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비네사의 잘못이지 데이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p.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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