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탈리아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지도 3달이 넘었는데 최근에 악셀이 데려간 이탈리안 샌드위치 가게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나온 것이 내내 아쉬웠다. 불어로 주문을 다하고 나서 수줍게 per favore 를 붙이는 것 이외에는. 이번 이태리여행의 큰 수확이라면 아는건 별로 없어도 이태리어로 입을 틀게 된 것이었다. 아는 건 많아도 여전히 발음이 어려운 불어에 비하면 굉장히 간단하고 음색만 비슷하게 내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은 희망찬 언어다. 아래 사진은 피렌체에 도착한 첫날(30일 저녁)에 숙소에서 2분거리에 있던 식당이다. 9시에 가까운 시간이고 혼자여서 유명한 식당인데도 테이블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서빙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이태리어로 대답을 하니 메뉴도 이태리어로 주고 영어 메뉴판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구글에서 본 나물이 들어간 수프를 시키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이제 없다고 한 딱 그 음식이었다. 비슷하다고 한 토마토 수프가 있다고 해서 시켰는데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도 으깬 쌀이 들어간 이탈리아식 죽을 맛 본 경험이었다. 메인요리도 전부 토스카나지방의 음식이라 고기밖에 없어서 어떤걸 주문할지 고민하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대로 Trippa를 골랐다. 곱창을 면처럼 얇게, 그리고 짧게 잘라서 토마토 소스에 나왔는데 조금 느끼했지만 화이트와인과 같이 먹으니까 그래도 먹을만 했다. 겨우 와인 한잔 주문하는데 un bicchiere di vino bianco를 한 음절씩 말하느라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응원을 하고 옆 테이블의 이태리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실제로 요리에 쓰이는 마늘을 대롱대롱 달아놓은 것도 나름 가게를 꾸며주는 역할도 한 점이 좋았다. 오래된 식당의 구조인 벽에 부착된 의자도, 따뜻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주는 타일도 진한 나무색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2.
10년도 더 전에, 2013년에 와본 피렌체는 기억에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초록색 대리석의 웅장한 산타마리아 대성당, 비볼리에서 먹은 젤라또. 실제로는 젤라또의 맛이 기억나는 것보다는 젤라또가 담겨있던 컵의 디자인과 놀랄만큼 맛있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당시엔 구글맵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번에 그 젤라또 가게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컵의 알록달록한 나뭇잎 모양의 로고를 발견했다. 첫날에 지나가는 길에 들렸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나쳤고 그 이후에는 가게가 문들 닫아서 결국 맛보지는 못했다. 2013년에 베끼오다리가 배경으로 나오게 찍은 사진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야경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일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때는 보지 않는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지금은 유명한 곳이어도 인파가 몰리면 절대 못가는 성가신 예민한 성향이 되었다. 베끼오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도, 미켈란젤로 언덕까지 올라가지도 않는다. 정확히 콕 찝어서 어떤 대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견문이나 시야의 폭이 넓어진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까. 10년 동안의 무수한 여행들을 돌아서 다시 피렌체에 오니 생경하다.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답지만, 지난 시간들은 다른 각도로 미를 음미하는 과정이었다. 미리 예약을 안하고 우피치 미술관에 못간 것이 조금 아쉽다. 아름다운 그림들을 마주하지 못한 것이. 다음번에 다시 이 도시에 오면 시간을 내서 우피치 미술관 투어도 신청해보고, 미술관의 카페에도 갔다가 보고 싶은 그림도 오랫동안 봐야지.
3.
조각상들을 고치는 아뜰리에가 산타마리아대성당의 가까운 골목길에 숨어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바캉스를 떠나기 전에 대청소를 했는지 창밖으로 본 내부는 아주 깔끔했다. 타일을 몇개 붙여놓은 세면대만 달랑 설치되어 있고 공간이 넓은 작업실이었다. 입간판에는 조각물을 붙여놨는데 아뜰리에에서 하는 일을 묘사한 조각예술을 (아뜰리에에서 직접 만든 것이 분명한) 간판으로 걸어놓은 것이 근사했다.
4.
종이에 무늬를 찍어내는 피렌체 특산물인 Carta Marmorizzata. 시내에는 유명한 가게 Il papiro와 Signum이 있다. 무늬 자체는 Eredi Paperone Bottega d'Arte의 매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수공예품이라 그런지 재고가 한정된데다 크리스마스 연말을 맞아서 물건이 많이 빠진 듯 했다. 원하는 무늬에 원하는 사이즈의 수첩은 살 수 없었다. 내부에 있는 근사한 아뜰리에를 볼 수 있었다. 벽 한쪽에는 어린이가 그린 귀여운 대성당의 모습을 프레임에 걸어놓은 것도 있고, 17, 18세기의 역사적인 레퍼런스들도 붙여놓았다. 오른쪽 사진의 실제로 내가 피렌체 도서관에서 찍어놓은 책들인데 고유의 무늬가 아름답다. Il papiro에서 산 회색의 마블링 노트는 포장까지 근사하게 되어 있어서 밀라노에 돌아와서 친구에게 선물로 줬고, Signum에서 노트 2권을 샀다. 여러해가 지나고 보니까 동일한 노트는 2권씩 있는 것이 마음이 든든 한 것 같다. 특히 여행에서 사온 노트들을 쓰는 것이 좋은데 일상에서도 여행이 남아있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쏙 드는 노트를 못 사오는 경우도 있지만, 뉴욕과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서 사와서 이미 다 쓴 노트가 책장에 꽂혀있다.
5.
피렌체에서는 건물의 천장이 굉장히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전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한국에 가면 그것보다도 천장 높이가 훨씬 낮지만. 다른 곳들도 프랑스에서 본 적 없는 높은 천장이었지만 특히 시뇨리아 광장의 근처에 있던 Caffe San Firenze는 엄청난 높이었다. 눈대중으로 사람의 키만큼 몇 번이나 더 붙여아 천장에 닿을지 가늠 할 수도 없었다. 5미터는 거뜬히 넘고 10미터에 가까운 듯 했다. 바는 굉장히 좁고 사람이 북적였는데도 천장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많이 남아있어서 공간감을 부여하는 것이 한 눈에 느껴진다. 소파자리에 벽에 짜놓은 텍스타일 작업도 고전적이지만 온화하게 아름다운 무늬였다.토스카나 지방이 연상되는 올리브색과 갈색 작은 꽃무늬가 구름처럼 반복.
6.
12월 31일의 마지막 와인을 마신 곳 Gilli. 내가 좋아하는 피노그리(pinot grigio)를 마셨고 청포토처럼 커다랗고 아삭한 올리브를 곁들여 먹었다. 태국 치앙마이 여행을 하던 중에 혼자 1월 1일을 맞이한 어느 해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원을 보면서.
파리에서도 리츠호텔의 바 같은데에 가면 느낄 수 있는 근사한 서비스이지만 여기는 어떤 역사적인 공기가 느껴진다. 1733년부터 카페였다고 하니. 메뉴판의 첫 페이지에 있는 추파를 던지는 이탈리아 남자들과 젊은 여자사진이 눈에 띈다. 나중에 찾아보니 Ruth Orkin이라는 사진가의 An american girl in italy(1951)라는 작품이다. Gilli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찍힌 사진. 하늘색과 네이비색으로 술메뉴판을 따로 구분 한 것, 건물의 시계모양을 금박으로 따서 표지를 만든 것도 예쁘고. 홀 서비스에는 한국인 여자 직원이 있었는데 영어로 말할때 한국인임이 느껴졌다. 이탈리아어는 워낙 잘해서 듣는데도 기분이 좋아지는 상쾌한 목소리였다. 한국어, 불어로도 번역되지 않아서 아직 리스트에 남아있던 제프다이어의 White sands를 운좋게 Todo modo라는 북카페에서 발견해 읽기 시작했다.
7.
눈 여겨둔 식당 몇 곳이 전부 문을 닫았던 날. 근처에 소박하게 생긴 식당에 들어갔는데 너무 맛있는 식사를 했다. 생 애호박을 샐러드로 먹어본 것도 처음이지만 치즈와 트러플과 어우러지는 아삭한 맛이 너무 근사했고, 이탈리아의 버섯인 porcini가 들어간 리조또도 부드러운 버섯이 풍부해서 맛있었다. 레몬첼로처럼 식사 후에 마시는 갈색의 리켜를 가져다 줬는데 뭔지 물었더니 Alfredi의 Amori라는 설명만 해줬다. 다 마셔야 할 것 같은 임무가 주어진 것 같아서 천천히 들이켰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8.
1월 1일. 이 날은 아르노 강의 남쪽에 있는 동네를 구경했다. 산토 스피리초 교회를 끼고있는 광장에는 식당과 카페가 늘어서있는데 젊은이들이 테라스에 앉아있던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와 크림빵을 시켜서 나도 테라스에 앉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그런 화사한 겨울 날씨였다. 새해 인사로 온 메시지들에 답장을 하고, 수첩도 펼쳐보고 한참 쉬다가 하루를 시작했다.
견고하게 잘 만들어진, 세로축에 구멍이 뚫려서 가로축을 차례로 끼워넣은, 밀라노에서도 예전에 보고 마음에 든 창살들. 조촐한 가게이지만 간판과 정문을 따라서 외경에 한번 더 marie-louise같은 테두리가 있고, 그 바깥에 또 테두리로 장식해서 판 건물의 형태가 간결하고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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