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오모 성당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늘어선 줄 때문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어찌저찌 들어간다고 해서 내부에 관광객들이 넘치게 많은 것도 싫어서 입장은 하지 못했다. 언젠가 들어가보는 날이 오겠지… 바로 뒷골목에 마차를 타고다니고 두오모 바로 앞에 트람이 지나가던 예전 흑백사진들을 전시해 두었는데 굉장히 멋있었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낮에 하얗게 우아한 모습도 멋있었지만 밤에도 은은한 조명으로 달빛처럼 빛나도 감동적이었다. 두오모가 우뚝 높게 서있어서 밀라노 시내에서 길을 찾는데도 한 몫을 했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나침반 역할이 되었다.
거기서 멀지않은 좁은 골목엔 Luini라는 도너츠집이 있었다. 도넛이 아닌 도나스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너무 구수하고 형태는 없고 손가락으로 대강 누른 자국이 남아있는 형태였다. 구운 것과 튀긴 것을 선택 할 수 있는데 구운 것은 눈으로만 봐도 목이 메일 것처럼 생겨서 매번 튀긴 걸로 골랐다. 그러나 언젠가 구운 것도 먹어보는 날이 오겠지. 애호박과 모짜렐라가 들어간 것, 시금치와 리코타치즈가 들어간 것을 먹어봤다. 지금까지 먹은 리코타치즈는 항상 짜다고 생각했는데 신선하고 좋은걸 안먹어봐서 그런 것이었나보다. 순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었다. 시금치는 건더기가 아니라 얇게 썬 조각들이 리코타치즈에 섞여있었는데 손으로 대충 소를 집어서 반죽 안에 넣고 꾹 넣었는지 다 구워진 빵에도 빵의 겉에도 초록색 잎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었다. 사오고 싶었지만 그런 도나스들은 갓 구워서 따뜻할 때 가장 맛있은 것이니까.
2.
두오모 성당은 아니지만 이름 모를 동네의 작은 성당에 잠깐 앉고 싶어서 들어가보기도 했다. 휴대폰도 배터리가 별로 남지 않아서 뭘 찾아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고해성사를 하는 1인용 나무 구조물에 들어가 신부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나이에도 여전히 커다란 고민이 있을까, 자식 걱정일까 궁금하기도하고 신부님은 그래도 지혜로운 해결법을 내놓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종교가 없기는 하지만 신부님이 고민을 들어주고 마음을 편하게만 한다면 요즘의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로써는 뒤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사주를 보는 것도 전혀 닮은 것 같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닮기도 했다. 나는 대학가 앞에서 단돈 3000원이면 볼 수 있는 그 흔한 사주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말에 신뢰를 하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해야 하는데 난 그런 미신은 믿지 않아요라는 눈빛이 먼저 나도 모르게 반사 될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이야기도 믿지 않을 것 같고 나쁜 이야기는 찝찝한 기분만 남길 것 같다. 쓰고보니 이렇게 냉소적일 수가. 다음에 한국에 가게되면 궁금하니 한번 해볼 법도 한데 이렇게 적어놓고도 언젠가 길가다 보게되면 또 그냥 지나칠 것이 뻔하다. 종교도 사주도 아닌 내가 믿는 건 시간의 힘과 운명이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다보면 온전한 시간, 온전한 노력을 하다보면 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거라는 믿음. 몇 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친구와 완전히 마음을 열고 가까워 지는 일, 꾸준히 해온 클라이밍으로 등의 특정부위에만 근육이 쌓여가는 것. 시간을 진심으로 다할 것 그리고 그 나머지는 운명에 맡길 것.
3.
동네 기사식당 같은 편안함이 있는 곳에서 한국에서만 보던 가스난로를 우연히 봤다. 외국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보고 반가웠던 물건이다. 커다란 가스통을 뒤에 품고 있고 앞에는 네모난 창살 안에 발갛게 불이 들어오는 난로.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차례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좀 나가면 자리를 뜰까 싶어서 테이블에서 기다리다가 결국엔 끝나지 않는 줄을 보고 가서 나도 기다렸다. 어떤 금발머리의 여자가 단정한 버버리 자켓을 입고 캐주얼한 청바지에 이탈리아 전통신발인 friulane을 신고 있었다. 밀라노에 처음 도착한 날 숙소를 가는 길에 동네신발가게에서 알록달록한 신발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궁금했는데 실제로 젊은 여자들이 신고있으니까 더 예뻐보였다. 구글에 찾아본 결과 베니스에서 곤돌라 사공들이 많이 신었던 신발로 유명했다. 자전거의 바퀴를 재활용해서 만든 깔창에 벨벳으로 발을 감싼 것이 특징이다. 에스빠드류와 비슷하게 밑창에 굵은 핸드 스티치로 연결한 부분이 예뻤다. 밀라노 여자들이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어떤 색이 제일 예쁜지 골랐는데 네이비와 올리브색이 눈에 들어왔다. Gallo라는 현지브랜드에서 나온 걸로 사고 싶었는데 37이나 38사이즈는 남아있는 컬러가 없었다. 결국 떠나는 마지막날 배낭을 다 싸고 숙소 바로 앞에있는 동네 신발가게에서 한켤레 사왔다. 가게 입구에는 ‘If you are not sure, do not buy it’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는데 이태리 사람들의 매력적인 성격중에 하나다. 자부심이기도 하고. 근데 오히려 이런 문구가 있으면 더 사고 싶어지는 심리란게 있어서, 여기서 처음 신어본 것으로 구매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를 받는다고 출입문에 스티커가 붙여져 있지만 막상 카드를 대니 그 카드는 안받는다고 하는 건 이제 그러려니 했다. 내가 산 프륄렌은 네이비도 아닌 코발트블루도 아닌, 로얄블루에서 아주 조금 더 짙은 색상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수제작의 디테일은 전혀 없었지만 다음에 이태리에 왔을 때에는 다른색으로 또 사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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