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근하느라 정신없이 일주일이 흘렀고 마침 공휴일도 끼워서 드디어 주말이 되었다. 알람을 전부 꺼놓았는데도 6시 30분이 되자 눈이 떠졌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워있다가 날이 조금씩 밝기 시작하고 거실로 나왔다. 저번주에는 겨울시간으로 바뀌어 한시간이 늦어져서 일출시간이 당겨졌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우리집 아날로그 시계 두 개는 여전히 한시간을 늦게 달리고 있다. 이 개념은 불어로, 한국말로 해도 항상 헷갈린다. 써 놓고도 맞는 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주어의 기준점을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2.
어느 주말엔 펠리페와 술약속을 잡아서 (취소되었지만) 피에르, 로렁과 함께 일본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부터 내가 눈여겨봤던 근사한 여자가 입구에서 친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고 어떤 아름다운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산을 하고 문을 밀고 나가는 찰나에 바로 그 여자가 나에게 Vous êtes très - belle 이라며 슥 말을 걸었다. 그렇게 상호적인 호감으로 상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나는 아주 진심을 담아서 VOUS AUSSI !! 라고 대답했지만 나의 진심이 반도 채 못 전해졌을 것 같고... 웃기게도 로렁은 오히려 나와 대화를 나눈 여자가 아닌 그 친구가 훨씬 예쁘지 않냐고 대꾸를 했다.
3.
월요일에 작업실에 가기 전에 4미리 지름의 laiton이 필요해서 레일라가 알려준 주소대로 가 본 곳. 막상 찾아가보니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외부는 이미 이 동네를 지나가는 길에 눈여겨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이곳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제국같았다. 계산대에 사인하는 펜이나 펜을 연결하는 체인마저도 황동으로 소소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이며 필요한 것을 말하면 작업대 뒤편으로 무수하게 쌓여있는 철더미들 사이에서 가져다줬다. 빼곡하게 서랍장으로 꽉 채운 아주 근사한 배경.
4.
남자 셋과 같이 평일의 전시회 데이트, 오전엔 알라이야 전시를 보러 갔다가 마침 쉬는시간이라 직원들이 나와있어서 성드힌과 바티스트를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오귀스탕은 무대의상을 디렉팅하고 있어서 전시를 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팔라펠을 점심으로먹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냥박물관에 갔다.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하고 칙칙한 느낌의 사냥박물관의 곳곳에는 현대미술품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한층 세련되었다. 소피칼 전시를 한 이후로부터 인기몰이를 한다고 했다.
5.
델핀과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터라 샹젤리제에서 동선이 맞아 아트바젤 기간동안 건너편에 설치된 모던아트 전시를 보게되었다. 마음에 쏙 들었던 독일 작가의 돌로 만든 책작품. 나중에 찾아보니 컬러와 모양도 다양하게 많았다. Kubach-Wilmsen. 오른쪽 그림은 Antonio Segui
6.
지난주엔 하루에 한 시간씩 매일 수영수업을 받았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수영장이 하필 20구에 있어서 집에서는 꽤나 멀었는데 매일 동선을 짜서 중간에 좋아하는 카페에 들리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를 구경하기도 하고. Place des Fêtes라는 우연히 지나간 곳에는 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예전에 다니던 아뜰리에 근처에 있던 상인들의 매대가 몇 군데 보였다. 한눈에 알아본 꽃집은 유난히 식물이 건강해서 항상 여기서 사면 죽는 확률이 꽤 낮았다. 선인장이 저렴한 것이 보이길래 하나 샀다. 아침에 면접을 보려고 새하얀 셀린 트위드자켓을 입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집에 들려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오기도 했다.
7.
어느 토요일 아침엔 마침 방학기간이어서 주얼리수업이 없는 날이라 로렁을 데리고 브로컹트에 갔다. 나도 오랜만에 가는 길이었다. 8시에 보기로 약속을 잡아놓고 자전거를 타고 카페에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다가 동이 터서 밖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이날의 최대 수확은 주얼리 도구들이 들어있는 공구함이었다. 올리브색 철제박스가 예뻐서 눈길이 갔던 공구함인데 살펴보니 도구들은 주얼리를 만드는데 쓰는 것들이 많았다. équerre나 lime, marteau 등. 꽉 차 있는 도구들 중에서 절반은 생김새로는 용도를 모르는 것들이기도 했다. 안에있는 것까지 통째로만 판다는 상인의 텃세에 고민을 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사게되었다. 항상 오래전부터 도구들을 파는 아저씨도 있는데 지나가는길에 들려서 내 공구함을 열어서 보여줬다. 금속용보다 돌기가 더 두꺼운 lime 들은 가죽용으로 쓰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으며 거래를 시도하자 아저씨가 몇 개 고르고선 나보고 가격을 물으니 가늠이 안 갈 뿐더러 숫자를 막 던지기에도 조심스러워서 그냥 아저씨 매대에 있었던 도구들을 골라서 물물교환을 하기로 했다. 뾰족하지만 가벼운 콤파스와 동그란 바디가 아름다운 bocfil을 골랐다. 길이 조절이 안되는 모델인데 끼우는 scie의 길이가 어느정도인지도 기억도 안났지만 그냥 집었다. 얇은 marteau를 아저씨가 탐냈는데 내가 그건 안된다고 하자 재밌다고 웃으시며 알았다고 하셨다. 다른 정체를 모를 도구들은 더 꺼내놓고 왔다. 그러던 와중엔 미국인손님이 아저씨 작품을 보고 질문을 하자 "영어는 모르니까 거기 적혀있는 소개문으로 읽어보쇼"라고 불어로 말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통역도 해드리고 재밌는 거래를 마치고 돌아섰다.
로렁이 모던예술 전시장에서 설명해줘서 아주 최근에 알게된 Serge Poliakoff라는 작가가 있는데 처음 볼 때는 잘 모르겠다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작품들이 아름다웠다. 브로컹트의 매대에서 손바닥만한 종이에 폴리아코프의 그림같은 것이 보이길래 어 폴리아코프가 아니니? 라고 로렁에게 물었는데 상인이 굉장히 기뻐하면서 얼른 열어보라고 재촉을 했다. 전시의 초대장이었는데 아름다운 종이에 프린트가 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도 생각이 나서 지금까지도 사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일요일 아침에 다시 가볼까 고민중이다. 그다지 유명한 콤포지션이 아닌데 모양과 컬러의 배색으로 추측을 했기 때문에 아저씨는 나에게 볼 줄 안다며 계속 칭찬을 해주셨다. 점심으로 쿠스쿠스도 먹고 운동까지 갔다가 같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알찬 하루를 보냈다.
평일의 끝을 맞아서 퇴근후 저녁으로 마리옹과 간단한 안주와 와인을 마셨다. 다른 테이블의 남성분이 입구에서부터 혼자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와인을 건네주고 좋은 와인을 몇 잔 얻어마셨다. 마리옹은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와인의 종류별로 잔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테이블에 여러 와인잔이 쌓였다. 일본인 여자가 같이 식당을 한다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일본스타일 프랑스 타파스 음식들이 있었다. 참기름이나 간장베이스로 한. 뻔할 것 같은 음식이라고 기대를 안해놓고 재료도 좋고 요리가 잘되서 맛있게 먹었다. 이름도 기억 안나는 스위스산 치즈가 지금까지 먹은 프랑스치즈보다도 맛있었는데 수영장에 갈 때면 자전거를 대놓고 생제르망 대로에 항상 지나다니던 COW라는 치즈전문점에서 들고온 거라고 하니 한번 들려서 사 봐야겠다. Cheese Of the World라는 유치한 이름이라 지나갈 때마다 피식 웃었는데 그럴게 아니었다.
OTTO, 이탈리아어 기초들을 배우고나니 어또가 숫자8이라는 뜻도 알고, 프랑스 드라마에서 스치듯이 나온 auguri라는 이탈리아어도 들렸다. 언어를 배우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초반에 외국어에서 단어나 기본적인 동사만 조금씩 들리는 것에서 오는 기쁨같은.
나중에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면 발음과 억양차이로 인해서 언어별로 목소리 자체가 바뀌게 된다. 영어는 굉장히 낮은 목소리라서 확연히 차이가 있고, 불어와 한국어 둘은 조금 가까운 그룹이었다. 얼마 전엔 한국친구, 로렁과 같이 있었는데 내가 두 언어를 교차하면서 목소리가 바뀌는게 무척 흥미롭다고 알려줬다. 이탈리아어는 불어와 한국어 어느 사이에 위치할 것 같은데 목소리는 음의 높낮이 만으로 결정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고, 음색이라고 말하듯이 소리의 질감같은, 어떤 묘사하기 어려운 영역인 것 같다. 어쨌거나 언젠가의 목표는 이탈리아어의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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