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_ 윤혜정 인터뷰집
내 친구로부터 어느 여름에 택배로 선물 받은 책. 19인의 예술가들의 인터뷰집인데 패션잡지에서 가볍게 다루는 연예인이나 배우의 인터뷰와 비교하지 못할, 그런 깊이있는 예술적인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세계적인 거장이나 한국의 예술가들을 골고루 담아낸 이 묵직한 책은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고 도록을 꺼내 읽는 것 처럼 가끔 하나씩 펼쳐 읽었다. 작품들의 사진이 담겨있는 것도 참 좋았고 어떤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보는 것 만으로도 성취감이 드는 책이다. 이런 내용을 한국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박상미 작가와 어떤 비슷한 결이 느껴지기도 했다. 책에 나온 마음에 든 작품이나 작가들은 따로 적어서 찾아보기도 하고 나중에 보고싶은 책이나 영화에 노트해 두기도 했다. 게다가 얼마전에 윤혜정 작가의 새 책이 출간되어 올해에 한국에 가면 그것도 사서 옆에 꽂아두고 읽어야겠다.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 캐나다 건축사진작가 로버트 폴리도리
그 책을 만들 땐 칼 라거펠트가 의도한 하메르스회(Hammershoi, 덴마크 화가인 빌헬름 하메르스회 그림 스타일 같은 옐로모노톤) 컬러를 표현해 내는 것이 관건이었어요. 사실 이 색감은 독일의 북쪽 지방에서 온 어느 직원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또 다른 예로, 스웨덴에서 온 이미지 오퍼레이터는 사진을 보는 눈이 다른 나라 직원들과 다릅니다. 각 나라별로 빛이 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난 항상 다양한 나라에서 온 직원들을 찾고 있습니다. p.31
지금까지 만든 책 중 최고의 책을 꼽을 수 있을까요?
나의 답은 언제나 ‘내일 내가 작업할 책’입니다. 과거의 프로젝트와 기존에 쌓은 모든 경험이 그 다음 작품에 고스란히 담길 거니까요. 나는미래를 위해 오늘이나 어제 했던 걸 반복 하지 않습니다. p.44
두 팔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로 나의 영혼과 몸 그리고 실존 자체를 끌어안는 느낌. 작가가 길 위에서 수십 년간 치열하게 고민해 얻었을 삶의 에너지가 발끝까지 도사리던 한기를 순식간에 거둬 갔다. 타인의 몸을 맞댔을 때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은 흔치 않지만, 생각해 보면 김수자와의 만남은 늘 그런 순간을 선사했다. 눈빛은 (바늘처럼) 꿰뚫는 동시에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특유의 낮은 목소리는 (이불보처럼)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일견 비정한 이론으로 무장한 미술 세계에서, 그렇게 김수자는 내게 통찰과 연민의 관계로 각인되어 있었다. p.51
그 즈음 출장길에 우연히 들른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나를 완전히 매료시킨 <만 개의 파도Ten Thousand Waves>(2010)는 중국 조개잡이 선원 스무 명이 영국에 밀입국을 시도하다 결국 전원 사망한 비극적인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중국 설화 속 바다의 여신인 마주(Mazu, 매기 청 분)의 시점을 빌려 표현한 이 작품은 6년 동안 제작되었고, 30여 개 도시에서 소개되었으며 “스타일과 세팅의 능수는란한 기교는 기술적 성취뿐 아니라 역사적 이해에 대한 성과”(뉴요커)라는 평을 받았다. 마주가 중국 천지를 날아다니는 모습과 현재 상하이의 마천루 풍경, 근대 상하이를 살던 어느 여인과 깊은 산중 낚시꾼의 모습 등이 교차 편집된 이미지와 시공간을 오가는 복잡한 내러티브가 아홉 개나 되는 멀티스크린에 신출귀몰했다. 밀입국을 시도하다 죽음을 맞이한 선원들, 이들을 움직이게 한 자본, 자본에 빠르게 침식당하는 전통, 기술사회로 격변 중인 중국 사회, 그렇게 자본에 휘청거리면서도 더 나은 삶을 찾는 사람들. <만 개의 파도>의 싱글 스크린 영화 버전에 “베터 라이프(Better Life)”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p.117
개념미술로 일상을 도발한 제니 홀저는 부지불식간에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권력의 남용은 놀랍지 않다)”라 쓰인 싱글렛에 짧은 청바지 차림의 여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은 전설로 회자되었다. 사람들은 홀저의 진실게임을 읽고 대화하고 밑줄 긋고 논쟁했다. 이 현상은 기억, 경험, 정치 성향 등을 촉매 삼아 대중을 결집시키는 서사가 되었고, 호의적이든 아니든 대중들의 반응은 작가로 하여금 작업을 지속할 명분과 힘을 주었다.
오늘날의 소셜미디어처럼 일상적 참여를 이끄는 ‘홀저그램(Holzergram)’은 여지없이 모두 대문자다.
“FEAR IS THE MOST ELEGANT WEAPON(공포는 가장 우아한 무기다)”
“YOU ARE A VICTIM OF THE RULES YOU LIVE BY(당신은 삶이 정한 규칙의 희생양이다)”
“ROMANTIC LOVE WAS INVENTED TO MANIPULATE WOMAN(로맨틱한 사랑은 여자를 조종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영화 찍는다’는 것과 ‘사진 찍는다’는 것은 같은 ‘찍기’지만 실은 반대 지점에 있는 개념이 아닐까요? (윤혜정 - 박찬욱)
어디에나 흔히 널린 대상인데도 딱 그순간에만 드러나는 낯선 느낌이 있어요. 찰칵 하고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채 그냥 사라져 버릴 어떤 순간. 물론 보통의 사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특정한 계절과 시간대에 어떤 빛을 받는 순간의 모습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거죠. 그 소중한 한순간을 남긴다는 건 숭고한 일이에요. 특히 영화를 만드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새로울 뿐 아니라 필요한 작업이에요. 내 영화는 자연스러움조차 그렇게 보이도록 철저히 꾸며 낸 결과물이지만, 내 사진은 의도적으로 미장센을 만든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우연히 그대로를 마주친 거거든요. 글니까 완전히 반대죠.
저 사람은 왜 저런 것에 매료되었을까, 왜 이게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까, 그런 걸 생각해 보도록 유혹하는 게 사실 예술의 중요한 존재 이유죠. p.266
아름다운 여자란 어떤 여자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윤혜정 - 아니에르노)
얼굴에서 지성이 읽히고, 나르시시즘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 읽히는 여인. 미안하지만 스물다섯, 아니 서른 이전의 여자 중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얼굴이 이런 내면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이이기 때문이죠. 여성은 아흔 살에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p.324
어떤 파격 변신도 특히 이자벨 위페르의 무표정을 능가하긴 힘들어 보인다. 나는 이렇게 다채로운 무표정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부진 몸에서도 느껴지는 차갑고도 지적인 이미지, 너무 연약해서 너무 강렬한 카리스마는 시적이거나 병적이거나 외설적이거나 부적절한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는데, 이에 무표정이 방점을 찍는다. 고집스럽게 앙 다문 얇은 입술, 상대를 꿰뚫는 서늘한 눈빛, 텅 빈 상태로 수렴되는 미묘한 웃음, 항상 약간 치켜들어 날선 오만한 턱선 등이 해가 갈수록 드라마틱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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