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상황과 이야기 _ 비비언 고닉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4. 8. 24. 05:29

본문

728x90

비비언 고닉_ 상황과 이야기

글쓰기로 구원을 외친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이 책은 특히 에세이에 관해서 여러 작품들을 예시로 드는데 마그리트뒤라스와 (불어발음인 맣겨히뜨와 아주 거리가 있지만) 조앤디디온 등의 작가들이 나온다. 오래된 고전이지만 처음 들어본 베릴 마크햄의 '이 밤과 서쪽으로'라는 책은 본문에 소개된 짧은 단락만으로도 강렬하게 남았다.

 

좋은 글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지면 위에서 살아 숨 쉬며, 작가가 무언가를 발견해가는 여정에 있음을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p.19

 

얼마 후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존재가 아닌 부재를 묘사하고 있구나.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누구였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는 깨달았다.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p.25

 

목소리의 어조 -우아한 목소리, 으스대는 목소리, 이성적인 목소리- 를 통해 서술자의 자세를 표명하면서 시작한다. 에세이가 진행됨에 따라 이 어조는 누그러진다. 부드러워지고, 질문을 던지며, 추측을 유도한다. 어조의 변화와 함께 서술자의 자세도 바뀐다. 이런 변화 과정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수단이자, 어떤 중요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 자체가 된다. 각각의 에세이에서 우리는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거저 얻은 확신에서 벗어나 신중한 재검토로, 명확한 자기 이해로 옮겨 가려- 애쓰는 정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적 은유는 종이 위에다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사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p.45

 

마흔이었을 때 나는 결혼을 익사와 동의어로 생각했다. 내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생활을 침범당하고, 내 자아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생각했다. 결혼 후 내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다. 내가 물속에서도 이렇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걸 미처 몰랐을 뿐.. 

모든 결혼은 수선한 옷이다. 우리는 결혼 생활을 더 좋게 만들 수 없고, 그저 극복해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경고했듯, 결혼함으로써 “우리는 자의로 삶에 증인을 들인 셈이고.. 험한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 해도, 똑바로 서서 어떤 이유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명료히 밝여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가 내 행동의 잘잘못을 따지고 들 테니까.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 남편과 나는 딸과 함께 어린이용 모노폴리를 하고 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미혼이었을 땐 재즈가 싫었지만, 이제 우리의 결혼은 이 음악에, 내가 바꾼 것들과 알게 된 것들에, 분노와 우아함에, 일상성의 감흥에, 서로와 함께라는 위안에 물들어 있다. 남편이 어떻게 나를 구하고, 내가 어떻게 남편을 구하고 있는지 보인다. 이 결혼 생활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상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자리에 여전히 통증이 느껴지지만, 이 순간만은 그 상실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결혼 때문에 치러야 했던 희생이 아니라 결혼이 끌어내는 용기와 다정함만이 보이고, 결혼 덕분에 우리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다. 베이커가 연주하는 곡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p.82

 

20세기가 저물면서 목소리의 힘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자 (통찰은 새롭지 않고, 거기에 담긴 지혜는 식상했다) 서사에 대한 갈망이 다시금 솟아났다. 새롭게 돌아온 ‘이야기’의 사실주의를 통해, 박탈감에 시달리는 독자들의 관심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만큼 사실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목소리만의 위력이 줄어드는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모더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중문화의 시대가 역사상 유례없이 강렬하게 출현했고,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지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진지한 삶이란 반추하는 삶, 이해하고 증언하려 노력하는 삶이다. 증언의 욕구로 대변되는 시대인 것이다.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현상은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요즘의 보편적 믿음에서 비롯된다. 세계 도처의 인권 운동과 일반적인 심리 치료 문화가 이런 믿음을 부추기는데 크게 일조했다.

(…)

하지만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회고록이란,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p.107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이 흘렀고, 내 인생에 너무도 많은 폭풍우가 들이닥쳤기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오롯이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 후에 ‘사람은 마땅히 얻을 것을 얻는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협곡과도 같았던 우리의 삶이 떠올랐다. ‘마땅히’라는 단어는 가진 자가 남의 것을 빼앗을 때 사용하는 무기이다. 무지의 어둠, 이를 겪어보지 않은 자가 그 의미를 어찌 알까!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무지하다. 앎의 세계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협곡 속의 우리는 생각하는 대신 행동으로 반응했다. p.121

 

일생의 막바지에 이르면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는 법을 터득하지만, 외로움에 맞서 싸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지켜보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카드를 섞거나 개를 돌보면서 자신을 회피한다. 외로움에 대한 혐오는 삶의 욕구만큼 자연스럽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굳이 문자를 만들지도, 한갓 짐승의 소리에서 단어를 빚어내지도, 그저 남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대륙을 횡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루 밤낮이라는 짧은 시간이라도 비행기에 혼자 있으면 지독하게 외롭다. 어둑한 공간에서 관찰할 만한 거라곤 계기들과 내 두 손뿐이고, 생각할 거리라곤 내 빈약한 용기의 크기뿐이며, 궁금해지는 것은 어떤 믿음과 얼굴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 희망뿐이다. 이런 경험은 밤에 낯선 사람이 내 곁에서 걷고 있음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만큼이나 놀랍다. 그 낯선 사람은 바로 나다. (이 밤과 서쪽으로) p.165

 

 

 

 

728x90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