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월 한달은 컬렉션시즌이라 한동안 퇴근을 늦게 했다. 당일날 새벽엔 4시 30분에 집에 도착해서 딱 1시간만 눈을 붙이고 6시에 다시 샹젤리제에 있는 패션쇼 장소로 갔다. 점심으로 스태프들과 햄버거를 다 같이 먹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택시기사 아저씨마저도 밤새서 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패션위크 스케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서 잠깐 낮잠을 자려던게 일주일동안 밀린 피곤함을 못이기고 깊은 잠에 들었다. 9월에 했던 첫번째 시즌과 다르게 동료들과도 더 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고 실수할까봐 조마조마하던 마음도 조금 녹아서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좋은 엔돌핀으로 마지막 일주일을 보냈다.
2.
아주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La salle des profs (독일어 원작: Das Lehrerzimmer). 처음부터 엔딩크레딧까지 느슨할 틈 없이 흥미로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교무실에서 생긴 절도사건으로 시작해서 학생들과의 갈등이 일어나고 순수하게 아이들을 좋아했던 주인공인 클라라도 결국엔 무너지게 되는데, 사회의 소우주 형태인 학교에서 보여지는 정치적인 형태와 모순과 비난들은 긴장감을 돌게 한다. 학부모들을 초대하는 저녁엔 화병에 꽃을 준비하는 모습부터, 감정이 격양되어서 목에 메고있던 스카프도 숨을 못쉬게 될만큼 갑갑해 보이는 장면까지 작은 요소들도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는데 한 몫을 했다. 어떤 진실과 진실을 둘러싼 유죄와 무죄를, 잘잘못을 따지는 영화로 괴물이나 추락의 해부같은 작품들과 어떤 비슷한 결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세 작품 중에서 이 독일영화가 제일 좋았다. 독일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독일영화는 익숙하지도 않지만. (외국어로 치면 오히려 이란이나 아랍어로 된 영화를 더 자주 본 것 같다.)
3.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5구의 골목길에 숨어있는 체스카페. 일로나와 일식집에 가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선 주소를 저장해뒀다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체스테이블로 가득 차 있지만 전혀 보드게임카페같은 분위기는 아닌 곳이다. 커피보다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셔야 할 것 같은 장소이기도 했다. 체스이야기라는 소설을 쓴 스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따서 츠바이크라는 칵테일도 있었다. 마리옹과 나는 수준급으로 체스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 둘이서 사이좋게 서로 봐주기도 하고 한번씩 이기고 말았는데 카페의 내부를 파악해보니 손님들은 우리처럼 일행과 온 것이 아니라 와서 게임을 둘 상대를 찾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오른편에 앉은 양복을 잘 차려입은 젊은 러시아 남자들도 있었고, 불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영어로 상대방과 간단한 대화를 한 후에 그저 체스를 둘 뿐이었다. 스포츠든 게임이든 언어를 교환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게 새롭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벽에는 체스와 관련된 사진들로 가득했다. 챔피언십에서 체스를 두는 플레이어부터 공원에서 체스를 두는 모습까지. 카페의 한 구석에는 천장이 통창으로 되어서 햇빛이 쏟아지는 곳이었는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은하게 빛이 들어왔다. 햇살 좋은 따스한 봄날에 다시 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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