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로 쓰인 글을 엮은 책이다. 오래 전에 브런치 사이트에서 공개된 글을 다 읽고도 종이책으로 더 읽을 것이 없나 궁금해서 이 책을 주문했다. 한참 전에 읽은 에피소드들은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고 전업작가가 아닌 작가의 글이라 더 날 것의 생기가 있었다. 큰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아니기 때문에 오탈자도 종종 눈에 띄는 그런 텍스트였지만 그럼에도 잘 읽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나도 해외에서 체류하고있는 이민자로써 공감되는 스토리도 많았고 누군가의 수많은 인생들의 민낯을 보니 어쩐지 애틋하다.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이 "태어난 애나 부모나 다 힘들고 피곤한데 낳지 말지 그랬니.."라고 하더군요. 허물없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겠죠? 그런데 제가 그자리에서 이렇게 받아쳤어요. "나도 내가 장애아 엄마가 될 줄 몰랐어. 사람 팔자 모르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잖아.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별 탈 없이 살았다고 해도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니. 너희들도 조심해. 어느 날 멀쩡한 네 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몹쓸 병에 걸려서 장애아가 되지 말라는 법 있니? 그때 가서 애한테 차라리 죽으라고 해라. 지금 네가 한 말 곱씹으면서." 모두 기함하더군요. 재 말이 마치 저주처럼 들렸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도 제가 안쓰러워서 했던 말일 텐데.. 참을 걸 그랬어요. 제가 생각해도 섬뜩한 말이에요. 그 이후로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도 안 나갔어요." p.83
김미경 씨는 뭐든 결정과 실행이 빨랐다. 서두를 필요 없다는 내 말에 막다른 곳까지 쫓긴 사람은 오래 고민할 겨를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p.95
영주권을 받아 온 가족이 캐나다에 와서 살다가 혼자 한국으로 돌아간 치과의사가 있었다. 오래 캐나다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영주권은 말소된 상태였다. 10년 넘게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삶에 회의가 들더란다. 50살 먹도록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치과의사가 되었는지, 결혼은 왜 했는지, 아이들은 왜 낳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10년 넘게 아이들 얼굴은 6개월에 한 번씩 방학 때만 봤고, 아내와도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다. 돌이켜보면 가족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영주권을 받고 캐나다에 와서 살겠다며 나를 찾아와 푸념처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어떻게 먹고살지가 막막했다. 결국, 남자는 가족과 합류하기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영주권 수속도 철회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아요."하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인생이 허무해지기 시작하는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가족을 부양할 돈벌이를 내려놓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대부분의 치과의사가 그랬다. 젊은 박진우 씨가 치과의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캐나다에 와서 살겠다고 하는 게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살다보면 캐나다가 지겨워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올테니까. p.277
민경씨는 한국은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다만, 나이가 많거나 권력을 가진 남자에게 대들거나 잘난 체하면 안 되고, 공주처럼 키워줄 능력 있는 부모, 돈 잘 벌고 이해심 많은 남편, 자상하면서도 성가시게 하지 않고 경제력까지 있는 시부모는 필수 조건이다. 직장 상사가 성추행하든 월급이 동료 남자보다 터무니없이 적든, 걱정할 필요 없이 보란 듯이 '취집'하면 평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바보같은 구석도 있어야겠지. 당하고도 당한 줄 몰라야 하니까. 하지만 행복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운명이 불행하게 흘러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아 할까. 모른 척 삶을 운명에 맡겨야 하나? 한국에서 불행해진 여자는 악착같이 노력해서 그곳을 탈출해야 한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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