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박 홍 _ 마이너 필링스
서구권에 사는 아시아인의 감정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내 마음 또한 벌거벗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언젠가부터 든 생각인데 나와 똑같이 생긴 한국사람들 속에 섞여서 성장을 하고, 독립된 자아가 형성되고 나서 외국에 나온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태어나서 남들과는 다르다는 실마리로부터 시작해서 내 자아를 찾는 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성인이 된 나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소수적 감정, 마이너필링스는 이런 특수한 감정들을 묘사하는 이를테면 앙금의 덩어리다. 이민 초반에 불어를 잘 못하던 시기에 나의 앙금과 분노는 곪을대로 곪아있었다. 지금은 할 말은 하고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말이 아닌 눈빛과 정황만으로도 상황이 정립되는 그런 일련의 일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음만 우아하게 다스리면 소수적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한 공간에 아시아인이 너무 많으면 짜증이 난다. 이 아시아인들을 다 누가 들여보낸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다.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 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자기를 혐오하는 아시아인은 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르친 세라 로런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맹렬하여 - 자율적이고 정치적 참여도 열심히 하고 똑똑했다 - 참 다행이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아시아인 2.0이다, 고함을 내지를 준비가 된 아시아 여성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다가도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 가보면 머리만 예쁘게 매만지고 아무 말 없이 생쥐처럼 얌전히 앉은 아시아 여학생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는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입 좀 열어라! 안 그러면 저들에게 완전히 짓밟힌다고! p.27
할리우드는 아시아인에 대해 아직도 심하게 인종주의적이어서 어쩌다 영화에서 드물게 아시아인 단역 배우라도 나오면 황인종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장면이 나올까 봐 긴장하다가 안나오면 긴장을 푼다. 또 아시아인은 같은 인종 집단 내에서 가장 소득 격차가 심하다. p.38
지난 20년 동안,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도, 줌파라히리의 작품들은 아시아계 이민자는 순응적인 노력가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인종적 소설의 전형이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독자를 몰입시키는 이야기꾼인 라히리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이민자의 삶에 대한 “단일한 이야기”로 포지셔닝했던 출판업계의 잘못이다. 라히리는 문학적 차이를 찾는 백인 독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딱 적당한 수준으로 편안한 인종적 소품을 이용해 무덤덤하고 억제된 어조로 글을 썼으며, 작품 속 인물들은 생각하고나 느끼지 않고 그저 행동한다. “나는 은행 계좌를 트고, 우체국 사서함을 빌리고, 울워스 마트에 가서 플라스틱 그릇 하나와 수저 하나를 샀다.” 라히리 작품에 나오는 이물은 언제나 절제되고 그 어떤 내면 지햐성도 회피한다. p.75
프라이어는 내가 소수적 감정으로 칭하는 것을 채널링하는 사람이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클로디아 랭킨의 시집 ‘시민’은 소수적 감정을 탐구하는 책으로는 이제 고전으로 꼽힌다. 화자는 인종차별적 언사를 듣고서 자문한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지? 본 것, 들은 것이 다 확실한데도,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소수적 감정은 현대 미국문학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 감정이 생존과 자기 결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구성 원리와는 다르게, 소수적 감정은 중대한 변화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의 결여에 의해, 특히 변하지 않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경제 상황에 의해 촉발된다. 소수적 감정을 다루는 문학은 인종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트라우마가 개긴을 제자리에 묶어 두는 현상을 탐구한다. 제자리에 묶인다는 것은 “흑인이면서” 테니스를 치고 “흑인이면서” 외식을 하는 것이다. 증언에 증언이 이어져도 배심원단의 평결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랭킨은 다음 쇄를 찍을 때마다 경찰에 살해당한 흑인 시민의 이름을 책 끝부분에 첨부도니 이미 긴 명단에 새로 추가한다. 이것은 추모의 행위이자, 변화가 충분히 빨리 일어나지 않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p.85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12
영화 빛 소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도입 장면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를 차별하면 우리는 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던 너의 최고급 호텔을 사버리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종주의를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백인의 세상이 우리를 포섭하는 방식이 아니던가? 우리가 응징을 하든 은혜를 입든 해서 우리를 파괴한 체제 속에서 저들보다 우월해지면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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