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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예술 _윤혜정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4. 2. 25.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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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예술 _윤혜정

 

두번째로 읽는 윤혜정 작가의 책이다. 먼저 읽은 인터뷰집도 좋았지만 이번 책은 그녀의 에세이 다운 글들이 많았다. 챕터별로 작가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책을 엮었지만 내가 이 모든 작가들의 이름과 작업을 기억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에 예술을 대하고 이해하는 그녀의 관점을 읽는다. 특별하지 않은 예술작품도 그녀는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갔다. 예술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인생으로 해석이 마무리 되는 전개다. 인생이 그렇게 쉽게 해석이 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하는 어떤 무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자체로 위로가 되는 이야기랄까. 소설은 아니지만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가 엮여서 단편소설 같기도 했다. 제프 다이어가 사진가를 소개하면서 엮은 책들은 더 객관적이라면 윤혜정 작가의 책은 더 친밀했다. 미술을 마음껏 향유할만큼의 이해도가 단번에 생기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엔 그 전보다 한 뼘이라도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디에 시야를 둘 것인가.   

 

어젯밤에는 친구커플과 연극을 보고왔다. 죽은 시인의 사회. 영어로는 Dead Poets Society. 불어제목은 Le Cercle des poètes disparus. 굉장히 유명한 영화였지만 직역해 놓은 불어제목으로 들었을 땐 전혀 감을 잡지 못했었다. 이미 한번 본 앙뚜안이 마리옹에게 추천했고, 나는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보였을 뿐인데 어쩌다보니 전화로 좌석 문의를 한 그가 내 티켓을 벌써 사놓아서 얼떨결에 가게 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연출도 괜찮았지만 나는 어쩐지 연극보다는 영화가 더 감동적이다. 그래도 1800년대부터 존재했던 극장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나 샤뜰레의 극장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작았고, 오페라 가르니에처럼 칸막이마다 문을 열어서 발코니에 사람들을 서너명씩 넣어놓고 문을 닫았다. 바깥쪽 복도에서 보면 원형을 따라서 좁고 기다란 문만 빼곡하게 이어졌다. 좌측에는 홀수번호, 우측에는 짝수번호로 나뉘었고 우리가 들어간 발코니는 8번 로지였다. 좁은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면, 화려했지만 세월이 지나 낡은 파리지앵 건물에 지금은 페인트만 급하게 덧칠해놓은 상태였다. 그 당시에 툴루즈 로트렉이 극장에서 사람들을 그린 그림도 복도에서 볼 수 있었다. 낡아서 더 아름다운 빛바랜 카페트들,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계단의 형태, 돔 형태의 천장에 화려한 금박으로 별모양을 만든 장식. 벽에 달린 동그란 조명. 극장에 달려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조명이다.

 

극장이든 영화관이든 전시장이든 어떤 방식의 예술이라도 이렇게 다양하게 경험한 것들이 눈꽃처럼 수북하게 쌓여서 인생을 예술로 만들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에 기대하며. 

 

                

 

 

 

 

 

그는 어느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더욱 오래 생각한 사람의 웅숭깊은 마음으로, 그렇게 세상의 인정과 찬사에 연연하지 않고 삶과 예술을 자기 의지대로 끌고 나가기 위해 고요히 노력한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루었다. 자신이 내면화함으로써 직조한 그 절대한 세계에서 급할 것도 없이, 큰 욕심이나 야망도 없이 치열하게 자적했다. “유영국에게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그것을 구현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바쳐서 자연을 이해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묵묵한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저 예술가로서만 살고자 했더라면 그의 그림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곡진할 수 있었을까. 시대를 불문하고, 어떤 사람이 ‘재능 있다’는 것은 ‘끝까지 순수하게 성실하다’는 것과 동의어임을, 나는 유영국이 온 생을 바쳐 증명한 그림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물론 그 사이에 세월은 많이도 변했다. 지금은 누구나 스타도, 부자도 될 수 있다는 그 관대함을 빙자한 열린 세계 뒤에 몸을 숨기고는, ‘근면 성실’의 미덕을 시대착오적이라 치부하거나 빛나는 재능을 위한 기본값 정도일 뿐이라고 위악을 부리는 시대다. 기본보다는 기교가 주목받고, 겸양보다는 당당한 자기 홍보 능력이 박수를 받고, 자신감과 자만심, 자존감과 자의식이 흐린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순수함이 더 이상 자랑이 아닌 작금의 세상에서 나도 문득문득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니 그 전부터도 나는 더욱 기민하고 영리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충고를 수없이 들었고, 이름 없이 일한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인 양 어떻게든 알량한 성과를 인정받아 보고자 오늘도 무진 애쓰고 있다. 이런 시대에 과연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정답이란 게 있을까? 나는 누구나 자기 삶을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 내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호언장담해 왔다. 그러나 유영국처럼 순수하고 성실한 ‘예술가’처럼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 인정해야겠다. 물론 다 차치하고, 그런’사람’이 되기가 가장 힘들겠지만 말이다. p.225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을 자주 인용했다. “삼류 시인일수록 매력적이고, 잘 안 된 작품일수록 재미있다. 자신이 쓰지 못하는 시를 몸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이뤄 낸 업적 안에서 산 게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만들지 못하는 회화를, 작품을, 미술을 몸소 살았기 때문이다. p.247

 

사실 부모에게 받은 지독한 트라우마를 작업화하는 예술가는 부르주아 이외에도 많다. 어쩔 수 없이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먼저 좌절과 환희를 가르치는 생애 첫 관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식에게 받은 상처를 작업으로 이야기하는 예술가도 과연 있을까? 글쎄.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런 질문을 새삼 떠올리게 된 건 나 자신이 부모인 동시에 자식이라는 사실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 나이 들어 가면서 아이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부모의 두려움을 목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는 두려움의 정체를 몰라 이불 속에서 울고, 부모는 두려움을 감추려고 홀로 흐느낀다. 자식은 알고 싶은 부모의 속마음을 몰라서 슬프고, 부모는 모르고 싶은 자식의 속마음이 선명하여 슬프다. 부모에게 상처받는 자식의 사연은 늘 가슴이 아프지만, 자식에게 상처받든 부모를 지켜보는 건 더 괴로운 일이다. 자식은 제 부모의 과오를 기를 쓰고 기억하려 하고 이를 동력으로 살기도 하지만, 부모는 자신이 아니라 자식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잘못을 본능적으로 망각하려 애쓴다. 어떤 관계에서든 친절해지기 위해서는 충분히 잔인해져야 한다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잔인해질 용기를 차마 발휘하지 못한다. 부모는 자식을 키울 때 용감하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맞설 때 용감하다. 늙은 부모가 어린 아이보다 더 가여운 이유는 더 많이 기억하고 더 오래 사랑하기 때문이다. p.275

 

 

서양인 최초로 티베트불교에 귀의한 비구니 스님 텐진 빠모(Tenzin Palmo)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성들의 역사는 일부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퇴한 면도 있습니다. 현대 여성들은 전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고 있지요. 옛날 여성들은 비록 넓은 시야를 가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자신의 왕국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성들은 집과 직장 두 곳에서 왕국을 갖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독거 수행했다는 스님조차 뚜렷한 해결책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백기를 들어 버린, 정말이지 딸들의 뿌리 깊은 잔혹사. 그러나 엄마에게 감히 하소연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녀들보다는 주체적으로 살아왔고, 그렇게 살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85

 

어떤 일에 심히 몰두하다 보면 지금 여기에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박진아의 작품 속 인물 특유의 투명하고도 순수한 자연스러움은 누구든 그 완벽한 고립의 순간에 비로소 가장 독립된 개체, 나다움 존재로 거듭난다는 데 착안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들의 움직임은 전통적인 노동 현장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나이브하다’. 애초에 숭고한 노동을 피력하는 작품이 아닌 데다 모든 걸 재현하여 드러낼 의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실루엣은 뚜렷하지만 이목구비는 흐릿하고, 표정은 특징적이되 감정은 모호하며,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박진아의 그림은 소실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정보들의 간극을 보는 이의 경험과 감각, 내러티브로 적극 메워 보길 권하고 있다. p.320

 

삶이란 높은 탑을 쌓는 게 아니라 미완성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특정 세대가 아니라 바로 나로 구성된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삶은 별로 중대하지 않거나, 지겹도록 반복되거나, 너무 우연해서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전형적인 일상의 순간들로 직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소한 면면에 힘입어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명분과 이론이 제아무리 웅장하고 원대해도 일상의 루틴을 견뎌 내지 못하면 빛을 잃기 마련이고, 혁명을 위한 혁명은 실패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스스로를 신화로 격상시키지 않은 채 일상과 접속하고, 크고 작은 가능성과 저항, 변화의 경로를 탐색하는 것, 바로 나직한 자기 목소리로 ‘작은 이야기’를 해 온 자들의 몫이다. p.324

 

간혹 너무 피곤한 나머지 책 읽다 말고 난데없이 잠꼬대 같은 엉뚱한 소리를 내뱉거나 책을 얼굴에 떨어뜨려 코를 깰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이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일하는 엄마의 죄책감을 덜어 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십수 년간 이 ‘의식’을 지속해 오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휴식이든, 위로든, 웃음이든 내가 받은 것이 더 많았던 게 아닐까.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일단은 책을 소리 내 읽다 보면 딱딱하게 말라 버린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면서 물기가 돌았다. 백희나의 <알사탕>이든, 아나이스 보즐라드의 <전쟁>이든, 마스다 미리의 <빨리빨리라고 말하지 마세요>든 동화 속 간명한 가치판단과 정직한 희노애락은 쓸데없이 꼬이고 엉킨 어른에게 명확한 답을 선사한다. 흔히 어른들은 ‘동화 같은 일’이라며 위악을 부리지만, 바로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유일한 답이 되기도 한다.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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