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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_ 제임스 설터

甛蜜蜜/영혼의 방부제◆

by Simon_ 2023. 9. 8.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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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_ 제임스 설터

 

10년 전쯤에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처음으로해서 설터의 다른 책들도 대부분 읽었지만 이 책만큼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 뒤로 여행을 다니면서 몇 년에 한 번씩 펭귄클래식 버젼으로 나온 원서를 꺼내 읽기도 했다. Light years. 장편소설이지만 단편소설처럼 읽었다. 그가 묘사한 여자들을 흠모하기도 했고, 그런 여유와 초연함을 가진 중년이 되기 위해서 나름 내 자신에게 기대를 걸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직종이 비슷하기도 해서 콘래드라는 셔츠 재단사의 단호함을 사랑하기도 했고, 툴루즈 로트렉의 요리책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놀라운 미소를 띄기도 했다. 20대에는 툴루즈 로트렉이 누군지 조차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그가 요리책을 썼다는 사실은 새로울 따름이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미국에서 더 잘 팔렸던 것 같은 이 요리책을 불어 버전으로 이베이에서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활자 위에 과감히 겹친 삽화들이 특히나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우리집도 최근에 열심히 단장하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에 있던 아름다운 아파트를 중고서점의 책들에 끼어있는 아름다운 한 권의 책 같다는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소중히 갖고 있다가 시간이 많이 지난 후, 해변가의 묵직한 호텔침대에서 몇 시간동안 넋놓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녀는 스물여덟이다. 꿈이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을, 몸을 장식해줄 나이다. 그녀는 자신감 있고 차분했으며 목이 긴 종류의 동물에 속했다. p.30

 

콘래드는 억양이 약간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디 억양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국의 억양이라기보다 조금은 특별한, 완벽한 매너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비엔나 사람의 억양이었다. 목소리엔 심오한 현명함이, 분별 있는 사람의 현명함이 담겨 있었다. 혼자서도 제대로, 소박하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고, 신문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손톱은 잘 정돈되었고, 턱도 깔끔했다. p.39

 

그들은 벌써 오랜 친구 같았다. 많은 것이 서로 통했다. 콘래드의 얼굴 주름은 홀아비의, 경험을 통해 배운 사람의 주름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겸손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p.41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 거리들을 운전해서 지나갔다. 앨투나의 아침은 파랬다. 나무의 도시. 싸구려 카페로 가득했고 차들이 지나다녔다. 맛없는 음식과 못생긴 사람들. 이 모든 빈약한 인생들은 마치 거름 같았다. 그들이 이 마을의 나무를 키우고 주춧돌을 만들었다. 끝없는 고독과 평정. 바로 이 거리에 눈이 내리는 걸 떠올렸다. 그 길었던 겨울들. p.219

 

네드라는 자기가 사는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케이트라는 여자는, 뭔가 아는 듯한 얼굴의 이 여자를 갑자기 좋아하게 되었다. 감상이라곤 없는 얼굴로, 턱을 괴고 짧아진 시가를 피우는 여자를. 네드라는 여행이라곤 한 적이 없었다. 몬트리올조차 가본 적이 없었지만 인생이 어떤건지 알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그녀 깊은 곳엔 철새의 본능이 있었다. p.232

 

같은 날 밤 아노드는 첼시 근처 친구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가 그곳을 나섰을 때는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는 동쪽으로 걸었다. 그들은 저녁 내내 얘기를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저녁이었다. 친밀하고 풍성하고 끝이 안 나는 대화. 그렇게 얘기해도 아무도 지치지 않는. 그는 디킨스 풍의 사람이었다. 먹고, 마시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남의 재능을 평가하고, 바글거리는 도시 속에서 헤엄을 쳤다. 그의 외투 깃은 세워져 있었다. 보도엔 아무도 없었고 철제 셔터를 내린 가게들은 어두웠다. p.246

 

그녀는 지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아주 작고 가늘지만 분명한 주름을 보았다. 언젠가는 깊은 주름이 될 거였다. 그 주름들은 그의 성격과 운명의 흔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비리에게 갖는 약간 비굴한 존경심은 독특한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천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어딘가 아첨하는 성격이 있었다. 성공한 남자들을 지나치게 존경했다. 그의 자신감은 신체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자기 방에서 웨이트를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 같았다. 그는 힘이 셌지만 그 힘은 유아적이었다. 그들 사이에 뭔가 달라졌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애정을 가질 터였지만, 여름은 지나갔다. p.251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잔에 담긴, 얼음처럼 찬 마티니를 한 잔 마셨다. 날씨가 바뀐 것 같았다. 피처에 한 잔이 더 담겨 있었다. 독하고 투명한 술. 

“어떻게 이렇게 차게 만들지?” 그가 물었다.

“공교롭게도 당신이 주문한 술은, 내 생각에 진정한 하나의 테스트야. 재료가 좋아야 하고 그리고, 진을 냉동실에 넣어놓아야 해.”

“내가 언젠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바 열 곳을 뽑는 기사를 쓰려고 한 적이 있었어. 조사를 정말 많이 했지. 몸이 거의 맛이 가도록.”

“어디가 가장 훌륭했나요?” 아트 디렉터가 물었다.

“그런 곳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진짜 질문은 어디가 가장 가까이에 있냐는 거에요. 하루 중에 혀가 원하는 그런 시간이 있잖아요. 아무것도 안 되고 그저 한잔해야 하는 시간. 그럴 때 가까이 있는 술집이 모하메트의 낙원이죠.” p.326

 

후진 동네에 있는 이 아파트의 풍요로움과 편안함. 낡은 건물이었지만, 아파트는 공원처럼 아름다웠다. 중고서점에 쌓인 책들에 끼어있는 아름다운 한 권의 책 같았다. p.328

 

“나이는 진정한 척도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분명 여기서 임의대로 되는 것은 없겠지요. 제가 배울 게 많다는거,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아는게 더 많아요.” p.341

 

“추측은 종종 틀리니까..”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p.351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 p.353

 

이 굴복이, 이 승리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했다. 마치 하위 단계들을 다 지나 삶이 마침내 가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같았다. 바보 같은 희망과 기대, 꾸민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찾아 나서 얻어낸 성취였다. 그보다 못한 것은 - 그것이 비록 대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이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p.375

 

“너는 나보다 멀리 가야한다.” 네드라가 말했다. “알고 있지?”

“더 멀리요?”

“네 인생 말이다. 반드시 자유로워야 해.” 그녀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경우엔 필요한 일이었지만, 혼자 살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자유란 자기 정복이었다. 그건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그게 없는 삶이란 이가 남아 있을 때까지 느끼는 식욕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만. p.379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빛은 부드러웠다. 턱 근처의 점이 더 진해졌다. 얼굴의 주름은 더 이상 잠정적이지 않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사랑 대신 존경을 받을 나이였다. 허영을 키우고 잡지책을 넘기던 시절을 지나, 부러움을 받던 세상에서 더 넓고 더 고요한 세상으로 순례를 해 온 것이다. 여행자처럼 할 얘기가 많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p.381

 

그들은 현대미술관의 정원에서 만났다. 벽 밖의 도시는 무채색이었다.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햇빛에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 아래서, 저 강렬한 눈빛 안에서 네드라는 순간 감동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그 희귀한 느낌. 마음이 이미 닫히기 시작했을 때 찾아온, 친구를 사귀겠다는 생각. p.383

 

그의 몸에 온기가 번졌다. 마치 적과 한바탕 싸운 것같이 어지러웠다. 말 한마디로, 한 번의 눈빛으로 그녀는 그를 감쌌고, 흐린 하늘을 열어주었다. 빛이 쏟아졌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우연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사람이다. p.393

 

 

이브가 가족들 옆에 서 있었다. 외투 소매 밖으로 손목뼈가 드러났고, 그래서 더 수척해 보였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과 긴 손은 은행에 차압된 농장의 여자의 것처럼 보였다. 나사지 외투를 입었고 모자는 짙은 밀짚모자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짜릿하게 천박한 구석이 있었다. 조용하게 이런 말을 할 종류의 여자였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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