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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甛蜜蜜/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by Simon_ 2023. 12. 1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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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주 목요일쯤에는 퇴근하고 근처의 작은 영화관에서 퍼펙트데이즈를 봤다. 빔벤더스 감독의 작품이기도 했고, 일본을 배경으로 찍기도 했다. 큰 기대없이 본 영화였는데 여운이 길게 남았다. 주인공인 히라야마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두번째로 반복될 때에는 조금 지루할 뻔도 했는데 속도를 살짝 높여서 씬들이 반복되기도 했고, 그가 출근하는 길, 봉고차에서 카세트를 틀었을때 이번엔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매일 다른 노래를 들었는데 이미 아는 노래가 반이었다. 이 사운드트랙은 따로 저장해서 며칠 동안 들었다. 나의 20대 중반에 연인이었던 알렉스와의 추억이 담긴 노래인 벤 모리슨의 브라운아이드걸즈가 나올 때에는 반가워서 조용히 신나게 따라 불렀다. 

히라야마의 일상 속에서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았다. 아날로그 전화기로 급한 용무만 해결한다. 퇴근하고나면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로 집에서 저녁먹고 넷플릭스를 보는 것으로 평일을 꾸역꾸역 보냈는데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내가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는 말을 어디서 보고 이따금씩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에는 여전히 몸이 잘 따라주지는 않았는데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아름다운 일상들을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면서 결심이 더 굳어졌다. 저녁에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이든 휴대폰이든 전자기기를 켜지 않고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히라야마처럼.

물론 밤에는 외국어로 된 책은 집중력이 부족해서 읽지 못했고, 한국어로 된 책들만 읽었다. 나도 영화 속 그의 모습처럼 정돈되거나 규칙적인 나만의 일정을 지키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똑같은 카페에 도착해서 신문을 읽었고, 똑같은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먹었고, 매일 동선을 바꿔서 점심시간엔 산책을 했고, 매주 토요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10개는 되는 집 안의 식물들에게 물을 줬다. 우리집에 들어온 순간, 식물들도 이 스케줄에 맞춰서 생물활동에 적응된 것도 같았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열리는 집 앞의 시장에 가서 매주, 또는 격주로 반복해서 사는 익숙한 식재료들을 구매했다. 어제 산 것은 버터, 새우, 함박스테이크, 도라드 도미생선, 귤, 파프리카, 가지, 애호박.              

 

 

2.

회사에서 작업실인 2층과 미팅룸인 1층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순간. 같은 업계가 아닌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제일 특이한 옷들이 많은데 회사에서는 정말 눈에 띄게 독특한 색깔의 랑방 부츠를 신은 동료가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다음날에는 나를 위해서 더 특이한 다홍색 부츠를 신고 와줬다.  

 


3.

마리옹과 산책을 하던 어느 토요일. 내가 약속 장소로 잡은 빵집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는데 미리 동네에 도착한 마리옹이 다른 식당을 제안했고 딱 봐도 너무 별로일 베지테리언 베이커리집이었는데 그래도 그냥 승낙하고 테이블에 앉았고 대신 간단하게만 시켰는데 브라우니가 다 먹지못할 정도로 맛이 없어서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마리옹을 보면서 나는 그저 놀리면서 웃다가 나왔다. 한시간이 다 되어도 주문한 핫초콜릿이 나오지도 않았고 우리는 기다리다가 결국 나왔다. 정말 최악인 곳이었는데 그냥 상황이 웃겨서 기분이 나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맞춘 타임의 영화는 하루에 한 번 있는 불어 더빙버젼이었는데 둘 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봤다. 대신에 날이 환한 대낮에 영화관에서 나올 수 있어서 동네 산책을 했다. 신문과 잡지를 아카이빙해서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박스별로 세계 1차대전, 알제리전쟁, 베트남전쟁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기점, 또는 빅토르 휴고, 에밀졸라 등등을 기준으로 해서 묶어놓았다. 68년도의 뉴요커매거진은 그 옛날 옛적에도 지금처럼 표지만큼은 매력적이었다. 

파리에서 정말 드물게 남아있는 간판 가림막


우연히 점심시간 산책길에 들어가서 본 미모사 작품. 이미지만 보다가 실제 작품을 볼 줄은 몰랐다. 
12월을 관통하며, 크리스마스 장식들

 

 

 

회사근처의 독립영화관, 여기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6시 타임에 영화도 꽤 많았다. 영화관에서 배포하는 잡지에서, 겉 표지 앞 뒷면이 전부 한국배우였다. 
여전히 학부시절의 과제를 떠올리게 하는 마담그레의 드레스. 파리에서 전시를 다니며 여러번 실제로 드레스를 보니 이제 감흥은 덜한데 그래도 볼 때마다 오래전부터 꿈을 쫓았던 내가 생각나서 애틋한 마음이 든다.

 

먹구름이 한번에 밀려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인 하늘이었다.
특이한 사선 모양의 창문. 
처음으로 가본 페루식당 셰비시는 다른 곳에서도 먹어본 적이 있지만 고기에 피칸 견과류를 넣은 소스로 만든 요리가 인상적이었다. 노란색의 Aji de Gallina. 레시피도 찾아봤는데 나도 한번 집에서 만들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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